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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가나 북스의 전자책 『몽상가의 이야기』 일부를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 http://pegana.tistory.com/124
* 공개 기간 : 무기한

블라그다로스
Blagdaross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벽돌 흩뿌려진 황야에 황혼이 내려왔다. 별이 하나둘씩 연기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고 머나먼 창문에는 신비로운 불빛이 밝아졌다. 정숙과 고독이 깊어졌다. 그러자 낮에는 침묵하던 버려진 것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낡은 코르크 마개가 맨 처음으로 말했다.
“난 안달루시아(Andalusia 스페인 남부 지중해에 면한 지방)의 숲에서 자랐지. 그래도 스페인의 시시한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어. 그저 햇볕 아래서 강인하게 자라나며 운명에 순응할 뿐이었지. 어느 날 상인들이 오더니 우리를 베어다가 나귀 등에 가득 싣고는 바닷가까지 싣고 가더군. 바닷가 마을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이거야. 이어서 북쪽 프로방스(Provence 프랑스 남동부 지방)로 옮겨졌고 거기서 내 운명이 정해졌지. 거품 이는 포도주를 지키기 위해 내가 쓰였고 이후 20년간 나는 파수병 역할을 충실히 해냈어.
처음 몇 년 간 병속에 담긴 포도주는 잠들어 있었고 프로방스의 꿈을 꾸었지. 하지만 몇 년이 지나니 점점 강해져서 마침내 사람이 옆을 지나갈 때마다 온힘으로 나를 밀어내려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내보내줘! 나를 내보내줘!’ 시간이 갈수록 녀석은 강해지고 특히 사람이 지나갈 때면 격렬하게 날뛰었지만 난 한 번도 내 자리에서 이탈한 적이 없어. 하지만 내가 강하게 억누른지 20년이 지난 날 사람들이 연회를 열면서 나를 자리에서 빼내지 뭐야. 포도주 녀석이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인간들의 혈관으로 뛰어들어 그들의 영혼을 고양시키니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서 프로방스의 노래를 부르더군.
근데 사람들은 날 버렸어……. 20년간 지켜왔던 나를 말야. 처음 자리를 지켰을 때와 변함없이 강한데도. 지금 나는 차가운 북쪽 도시의 추방자 신세야. 한때는 안달루시아의 하늘을 알았고, 기뻐하는 포도주의 마음속을 헤엄치는 프로방스의 태양을 오랫동안 지켜왔는데도.”
누군가 떨어뜨린 듯한 멀쩡한 성냥개비가 다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태양의 자식이야. 그리고 도시의 적이지. 내 마음속에는 너희들이 모르는 많은 게 담겨 있다고. 난 에트나(Etna)와 스트롬볼리(Stromboli 둘 다 이탈리아에 있는 화산)의 형제야. 내 안엔 언젠가 아름답고 강력하게 솟아오를 불길이 잠들어 있지. 우린 화로에 예속될 일도 없고 먹이를 얻기 위해 기계를 돌릴 필요도 없어. 그날이 와서 강력해지면 먹을 걸 알아서 구할 수 있겠지. 내 마음속엔 멋진 아이들이 있어 무지개보다 화려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걔들은 북풍과 힘을 합쳐 북쪽으로 나아가게 되겠지. 아이들이 지나간 뒤는 모든 게 시커멓게 되고 세상에 그들 외에 아름다운 건 하나도 남지 않을 거야. 걔들은 대지를 거머쥐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텐데, 숙적인 바다 외에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야.”
이어서 낡고 부서진 주전자가 말했다.
“나는 도시의 친구라오. 벽난로 위의 노예들 중 하나지. 석탄을 때는 작은 불꽃 위에 앉아 있었다오. 노예들이 강철 막대 밑에서 춤출 때 나는 그 춤과 노래 한가운데에 앉아서 우리 주인들을 기쁘게 해주었지요. 고양이를 달래는 노래, 개의 마음속에 있는 고양이에 대한 증오의 노래, 그리고 기어 다니는 아기에 대한 노래, 집주인의 평안을 위한 노래를 질 좋은 홍차를 따를 때 부르곤 했다오. 집이 아주 따뜻해질 때면 노예도 주인도 기분이 좋아지고 나는 세상을 배회하던 냉담한 바람을 질책했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