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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가나 북스의 전자책 『경이의 서』 일부를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 http://pegana.tistory.com/141


정열적인 왕자들, 혹은 왕이라는 이름을 숨긴 음유시인들에게 여왕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무릎 위에 펼치고 저마다 차례대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두가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라 간혹 회랑(回廊)에 있던 궁녀들 사이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여왕은 깊은 밤 불어온 미풍에 흔들리는 무심한 목련처럼 무척이나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왕자들이 자기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말하고도 자기 자신의 눈물 말고는 아무런 전리품도 얻지 못한 채로 물러나자 이번에는 무명의 음유시인들이 다가와 우아한 진짜 이름을 감춘 채로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중에 아크로니온(Ackronnion)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길거리의 먼지가 뒤덮이고 남루한 행색이었으나 누더기 속은 숱한 전쟁에서 얻은 흠집투성이인 갑옷차림이었다. 그가 하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자 회랑에 있던 궁녀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구석에 있는 나이든 시종들조차 훌쩍이더니 울다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을 울리는 거나 굼뜬 여자애들로 하여금 무의미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건 쉬운 일. 허나 숲의 여왕 폐하에게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도록 만들지는 못할 터.”
여왕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가 마지막이었다. 군주도 왕자도 정체를 숨긴 음유시인도 수심에 잠긴 채로 궁전을 떠나야만 했다. 아크로니온은 가야 할 길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아파르마(Afarmah), 룰(Lool) 및 하프(Haf)의 국왕이며 제루라(Zeroora) 및 창(Chang) 언덕의 대군주이고 몰롱(Molong)과 믈라시(Mlash) 공국의 공작이었다. 모두 로망스에서 흔히 등장하는 지역이며 신화에서도 곧잘 다뤄지는 잘 알려진 곳이었다. 그런 정체를 감춘 아크로니온은 가야 할 길을 생각했다.
한편 다른 숱한 일들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어버린 이들은 요정나라─다들 아는 것처럼 세상의 끝에 있다─아래에 〈기쁨의 짐승(Gladsome Beast)〉이 살고 있음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그 짐승은 기쁨 자체였다.
하늘 높이 나는 종다리도 들판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착한 마녀도 사이좋은 노부부도 〈기쁨의 짐승〉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결점이─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약간의 속어를 쓰자면 단 한 가지 ‘에러’가─있었으니 이놈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면 〈요정나라를 돌보는 노인〉의 양배추 밭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당연한 듯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점이었다.
또한 알아야 할 점은 〈기쁨의 짐승〉에게서 눈물을 얻어내어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영감을 받아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연주할 때마다 그 누구라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아크로니온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여 음악의 매력으로 〈기쁨의 짐승〉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놈의 눈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리고 놈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사람의 눈물이 그렇듯 금방 마르기 마련이니까─동료에게 놈을 처치하도록 하고서 눈물을 갖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다면 숲의 여왕 앞에서 눈물을 마셔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하지만 용감한 사나이를 찾아갔다. 그는 숲의 여왕 실비아의 아름다움에 신경도 쓰지 않고 훨씬 예전 여름날에 숲속 나라 처녀를 아내로 삼은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아라스(Arrath)로 아크로니온의 창병이자 호위기사 중의 한 명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전설의 땅으로 들어가 세상의 끝에 있는 요정나라로, 누구나 아는 스스로 빛나는 왕국으로 향했다.
기묘하고 오래된 오솔길을 지나 혜성에서 나는 쇠 냄새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찾던 땅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초가집에 이르렀다. 〈요정나라를 돌보는 노인〉은 여기서 살면서 세상 저편을 향해 난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별 쪽으로 향한 방에 두 사람을 맞이하고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의 위험한 모험에 대해 듣고는 〈기쁨의 짐승〉을 죽이려 한다니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놈의 행복한 삶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음이 역력했다. 이내 노인은 두 사람을 뒷문으로 안내했다. 왜냐하면 정문 쪽에는 길도 계단도 없기 때문인데, 노인은 이런 정문을 배설물을 남십자성 위로 버리는 용도로만 쓰고 있었다.
일행은 노인이 심은 양배추와 요정나라에서만 피는 꽃이 가득한 정원에 이르렀다. 꽃은 모두 혜성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노인은 두 사람에게 ‘밑바닥’이라 불리는, 〈기쁨의 짐승〉이 사는 동굴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작전을 짰다. 아크로니온이 하프와 마노(瑪瑙)로 만든 그릇을 들고 계단으로 가고 아라스는 험한 바위산을 통해 둘러서 가기로 했다. 그러자 〈요정나라를 돌보는 노인〉은 바람에 쓰러져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양배추 밭을 지나갈 때는 무어라 투덜거렸다. 짐승이 한 짓이 생각났던 때문이리라. 그리고 두 사람은 떨어져서 각자의 길로 나아갔다.
이미 인육을 잔뜩 먹고 만족한 까마귀 외에 그들을 알아차린 존재는 없었다.
별들로부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크로니온이 간 길은 처음엔 험난한 등반이었으나 이내 평지에 이르렀고 이후로 놈의 보금자리까지 너른 계단이 이어졌다. 첫 번째 칸에 발을 딛는 순간 〈기쁨의 짐승〉이 내는 쉼 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