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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시간과 신들 - 해설

pilza2 2012. 6. 27. 19:00
◇ 페가나 세계관의 완성

본작은 로드 던세이니의 두 번째 출판작이며 전작 『페가나의 신들』의 속편에 해당한다. 이후로도 같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단편을 몇 편 발표하기는 했으나 그 분량도 적고 별도의 단편집으로 출간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전작 『페가나의 신들』과 본작 둘만으로도 로드 던세이니가 창작한 신화와 세계를 맛보기에는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귀족의 취미생활처럼 시작했던 창작 활동은 자비로 출판한 『페가나의 신들』이 좋은 반응을 얻어내면서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출판사의 격려에 힘입어 던세이니는 본격적인 작가로 활동하기에 이른다. 본작은 그러한 프로 작가로서의 첫 작품에 해당하고 그런 만큼 전작보다 더 세련되고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우선 전작의 경우 개개 단편의 길이가 무척 짧고 내용도 단순하거나 추상적이며 시처럼 쓰인 작품도 있었던 반면 본작은 개별 단편의 길이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분량이 많이 늘었고 수록작의 구성 및 플롯이 좀 더 현대적인 소설에 가까워졌다. 전체적인 인상을 볼 때 전작이 산문시였다면 본작은 소설이라고 할까. 아울러 전작의 내용을 보완하거나 세밀히 다룬 부분도 있어 함께 읽어보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던세이니는 그야말로 본작에서 자신이 창조해낸 페가나 세계관의 완성을 이뤘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후에 페가나를 무대로 한 작품은 거의 쓰지 않은 것만 봐도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후대 비평가나 독자가 페가나 세계에 속한다고 분류한 작품은 더 있으나 작가 자신의 의도는 알 수 없다). 사실 이미 페가나는 전작의 말미에서 이미 멸망을 그려내었기에 본작은 필연적으로 그 이후의 내용이 아니라 미처 못 다룬 이야기를 담았는데, 마지막 단편 「예언자의 꿈」만은 두 작품을 아우르는 결말이자 후일담의 성격이 짙다. 운명과 우연이 게임을 하면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신들이 죽고 페가나가 멸망한 후에도 다시 게임을 되풀이하면서 끝난다. 이렇듯 본작을 아우르는 테마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신들조차도 시간 앞에는 무력하고 유한한 존재이며 시간은 표면적으로는 신들의 시종이지만 언제든 그들을 배반하고 죽일 수 있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반면 그 신을 초월한 존재인 운명과 우연은 영원히 반복되는 게임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회귀와 신의 죽음을 말한 니체의 영향이 느껴지기도 하고, 전능하지 않으며 한계를 지닌 채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페가나의 신들은 최후의 전쟁과 함께 멸망한 북유럽 신화의 신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후 영미권의 판타지(대표적으로 J.R.R. 톨킨)가 북유럽 신화나 켈트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 많은 이유 중에는 던세이니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물론 던세이니 이상으로 장르 판타지에 깊은 영향을 준 윌리엄 모리스도 있겠지만). 유럽의 신화와 소수종교는 기독교의 전파로 쇠퇴하고 잊혔지만 이러한 판타지 작품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갇히지 않고 켈트 신화를 비롯해 잊혔던 신화와 민담을 되살리는 데 기여를 했으며, 이러한 기존 신화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2차 세계를 만들어내는 장르 판타지의 작법을 던세이니가 선도(先導)했음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 누락작에 대해서

원래 『시간과 신들』은 2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1부에 본 단편집의 수록작들이 있고, 2부는 「왕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꽤 긴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왕의 여행」은 작가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책의 분량이 적으니 추가해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으로 수록되었다는 이유도 있고, 전작 『페가나의 신들』까지 아우르는 페가나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 전체의 대단원으로 1부의 마지막 수록작 「예언자의 꿈」이 더 걸맞다는 이유도 있어서 이번 단편집에는 「왕의 여행」을 제외했다.
로드 던세이니는 이후로 페가나 신화를 배경으로 한 단편을 몇 편 더 남겼으나 다른 단편과 섞여서 출간되었고 페가나 세계관의 단편만을 모은 단편집은 본작 이후로 더 나온 적이 없다. 이에 페가나 북스에서는 나머지 페가나 세계관을 다룬 단편만을 따로 모아 단편집으로 낼 계획이며, 이때 이 「왕의 여행」을 여기에 포함하여 선보일 생각이다.
이 점 양해를 부탁드리며, 외전적인 이야기인 「왕의 여행」이 없어도 페가나의 신화에 대한 처음과 끝은 모두 담았으니 이해와 감상에 큰 지장은 없을 것임을 알려드린다.


◇ 번역에 대해서

번역은 전작 『페가나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의 텍스트판을 저본으로 했고 카와데쇼보에서 나온 일본어 번역판을 참조했다. 고유명사의 발음 역시 전작과 같이 일본어판을 참조하여 원작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조금 투박하게 옮겼다. 던세이니는 영국인이지만 이 페가나 세계관의 무대는 영국이라고 하기 어렵고 오히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그런 의미에서 〈Zeus〉를 현대 영어 발음인 ‘쥬스’라고 하지 않고 ‘제우스’라고 하듯이 〈Inzana〉를 ‘인재너’라고 하지 않고 ‘인자나’라는 식으로 옮겼다.
한편 본문에서 새벽 아이, 아침, 배, 섬 등을 〈she〉로 지칭하고 있으나 번역본은 한국어의 특성상 굳이 ‘그녀’로 옮기지는 않았다. 참고로 본문에 새벽 아이 인자나의 성별이 여성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은 없지만 시드니 사임의 일러스트에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절름발이, 난쟁이, 병신 같은 차별적인 표현이 나오는데 소설이 쓰인 당시 시대상이나 원문의 의미를 감안하여 그대로 썼음을 양해 바란다.


2012년 5월
pilza2 (편집자, 페가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