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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가나 북스의 전자책 『경이의 서』 일부를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 http://pegana.tistory.com/141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에도 평소처럼 새벽 기차를 타고 손님에게 그럴싸한 물건을 팔기 위해 마을로 향하고 있었으나 섑 씨의 영혼은 공상의 세계를 떠돌고 있었다. 이렇게 확실히 깬 상태에서 꿈을 꾸며 역을 나올 때, 불현듯 검고 추한 옷을 입고 일을 하는 건 진짜 섑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짜 자신은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동방의 고도(古都) 성벽 근처에 위치한 정글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그 도시를 라르카(Larkar)라고 이름 지었다.
“결국 공상도 현실과 마찬가지로 실체를 갖고 있는 거야.”
섑 씨는 논리적으로 완벽한 결론을 내렸다. 극단적으로 위험한 이론이긴 했지만.
또 하나의 삶을 살면서 그는 일과 마찬가지로 체계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우선 주위 환경을 확실히 파악할 때까지는 공상 속에서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특히 정글은 피했다……. 호랑이를 만날까 겁이 난 건 아니었지만─어차피 현실이 아니니까─미지의 상대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는 조금씩 라르카를 만들어갔다. 성벽을 쌓고 궁수를 위한 탑을 짓고 놋쇠로 만든 문과 그 외의 온갖 것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섑 씨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을 내렸다. 거리를 지나는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과 그들이 탄 낙타와 잉쿠스탄(Inkustahn)에서 수입한 온갖 물품과 도시 자체까지, 모두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들이었으니…… 이제 그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게 되었다. 섑 씨는 일을 하러 역을 나와 걸어가는 동안 길에서 스쳐 지나는 사람들이 모자를 들어 인사를 건네지 않았는데도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래도 토머스 섑으로만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할 정도의 현실감각은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라르카 도시와 북동쪽으로 펼쳐진 사막의 왕이었고 공상은 한층 더 멀리 뻗어갔다. 그는 낙타기병 연대를 이끌고 낙타의 턱밑에 달린 작은 은방울을 울리면서 라르카에서 출진했다. 그들은 태양을 좇아 달린 끝에 새하얀 벽과 탑이 노란 모래 위로 늘어선 머나먼 낯선 도시에 이르렀다. 그는 자기 오른쪽에 담청색, 왼쪽에 녹색, 앞에 자주색 비단을 두른 병사 셋을 이끌고 문을 지나갔다. 이렇게 그는 어느 도시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생활이며 햇빛이 탑을 비추는 광경을 보았고, 자신이 이곳의 왕임을 선포한 후 다시 공상의 세계 속으로 낙타를 타고 갔다. 그런 식으로 그는 도시에서 도시로, 나라에서 나라로 나아갔다.
섑 씨는 명석한 사람이었으나 왕들이 종종 사로잡히는 권력욕을 간과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처음 갔던 도시 몇 곳에서 번쩍이는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자기가 탄 낙타 앞에 엎드리는 모습을 보고, 병사들이 발코니에 서서 환호를 보내며 승려들이 자신에게 공손히 절을 하는 광경을 보니, 지금껏 친숙한 세상에서 최소한의 권력만을 갖고 있던 그가 어리석게도 탐욕을 품게 된 것이다. 그는 과도한 속도로 공상 세계를 넓히고 체계도 팽개친 채 일국의 왕으로서도 미흡한 주제에 영토의 확장에만 열중했다.
이제 그는 깊고도 깊은 미지의 땅으로 여행을 떠났다.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나라와 보루로 둘러싸인 환상의 도시를 지나며 그는 지나치게 전진에만 집중했다. 그림에서도 본 적이 없는 문이며 탑을 보았고 교활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몰려들어 자기네 군주로서 그를 환영하며 맞았으니…… 이 모두가 현실에서의 업무 능력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도 자신의 공상으로 그 아름다운 나라들을 다스리려면 아무리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 해도 다른 쪽 섑이 잘 먹고 잘 지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을 위해선 일을 해야만 했다. 섑 씨의 상황은 교활한 음모를 꾸미면서 인간의 욕심을 간과한 도박사의 실수에 더욱 가까웠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공상 속에서 아침에 낙타를 타고 햇빛처럼 찬란한 도시로 갔다. 마을을 둘러싼 오팔색 벽에는 황금으로 만든 문이 있었는데 너무나도 커서 문기둥 사이로 강물이 흘러갔고 문이 열려 있는 동안에는 커다란 갤리선이 그 위로 지나다녔다. 그럴 때면 악기를 든 악단이 춤을 추며 다가와 벽 주위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그날 아침 섑 씨─런던에 있는 육신을 가진 쪽─는 도시로 가는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1년 전만 해도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처음으로 공상을 보게 되어 온갖 일이 일어나게 되면 기억에 혼란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신문을 읽는 것도 관뒀다. 정치에 대한 관심도 잃었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점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