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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의 원조, 로드 던세이니
“아일랜드가 낳은 몽상의 거장”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누구도 던세이니를 흉내낼 수 없지만,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흉내내보려 할 것이다.” - C.L. 무어
로드 던세이니는 문학적 위상, 특히 판타지 장르에서 차지하는 무게감과 위대함에 비해서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검색을 해도 아일랜드의 희곡 작가라는 정도의 소개만 나오며 국내에 번역 소개된 작품은 단편집에 수록된 한두 편 정도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 및 작품 선정을 하고 해설을 쓴 〈바벨의 도서관〉시리즈 중의 하나로 단편집이 나와서 소개 및 입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지금까지 그를 아는 사람은 판타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소수의 매니아밖에 없었다. 흔히 말하는 요즘 판타지 소설을 흥미 위주로 읽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며 흥미를 느낄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판타지라는 장르를 좋아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 더 나아가 판타지를 쓰는 사람이라면 로드 던세이니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장르 판타지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J.R.R. 톨킨, H.P. 러브크래프트, 로버트 E. 하워드, 어슐러 K. 르 귄 등의 작가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서 C. 클라크, 이나가키 타루호, 닐 게이먼 등이 그에게 경의를 표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너무 많아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작가와 작품이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고, 2차·3차 영향까지 포함한다면 현존하는 판타지 소설의 거의 전부라도 해도 좋을 정도다.
판타지는 SF나 추리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의하고 분류하기가 어려운 장르다(로맨스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는 논의로 한다). 비현실성, 환상성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고대의 신화와 민담까지도 전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범위를 좁혀서 『반지의 제왕』으로 대표되는, 중세 유럽과 흡사한 2차 세계를 무대로 하는 소설을 판타지라고 한정해보면 그 시초는 영웅설화, 전설, 민담과 서사시가 될 것이다.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고대에서 중세까지 민담과 설화, 동화가 구분되지 않은 채 섞여(동화를 영어로 페어리 테일, 즉 요정 이야기라고 한다는 걸 감안하면 동화와 판타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전래되다가 인쇄술의 발달로 소설이라는 형식이 널리 퍼지게 되고 근대로 넘어오면서 고딕 소설이 큰 인기를 얻게 된다. 판타지, 호러, 로맨스, 심지어 SF(『프랑켄슈타인』과 같은 프로토SF는 종종 고딕 소설로 분류된다)까지 혼재된 이 ‘프로토 장르’의 세례를 받은 로드 던세이니는 독자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냈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었다. 그리고 이를 현대적인 소설이라는 ‘포맷’에 맞추어 선보였으니, 바로 판타지 장르의 탄생이었다.
본 필자가 조지 맥도널드, 윌리엄 모리스와 함께 로드 던세이니를 ‘근대 판타지의 빅3’요 ‘판타지 장르의 원조’라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동화도 아니고 중세 로망스의 단순 번안도 아닌 성인을 위한 환상 세계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지 맥도널드는 그 시초가 동화이며(『북풍의 등에서』는 오늘날에도 고전 명작으로 칭송받는다), 윌리엄 모리스는 중세 로망스의 번역자이자 디자이너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는데, 그들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차적인 세계와 이야기를 지어내어 판타지라는 장르를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로드 던세이니는 군인으로 참전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귀족답게 평화롭고 우아한 삶을 살았다. 그는 여행과 사색을 즐겼고 에도가와 란포가 그랬듯 현실보다 꿈을 더 소중히 여겼다. 『페가나의 신들』의 독특한 세계관과 토속적인 인명 및 지명은 아프리카 지방의 여행, 그리고 일본 신화에 대한 흥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국의 전설과 문화가 유럽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큰 자극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던세이니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이를 들라면 바로 J.R.R. 톨킨과 H.P. 러브크래프트라 할 수 있다. ‘빛의 톨킨, 어둠의 러브크래프트’(이 표현은 본 필자가 지어내어 예전에 다른 글에서 썼다)이라 불리는 환상소설계의 두 거장이 공통된 문학적 스승을 갖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글에 반하여 던세이니의 세계관을 차용하거나 작풍을 모방한 단편을 쓰면서 습작을 했다. 오늘날 말하자면 팬픽션이나 2차 창작에 해당할 텐데,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일 크룰루 신화라 불리는 거대한 세계관에까지도 그 영향을 이어갔다. 즉 던세이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크툴루 신화를 제대로 해석이나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외계의 신들이 깨어나 돌아오기만 하면 인류 따위는 단숨에 사라질 수 있다는 크툴루 신화의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세계관은 던세이니의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본작과 『시간의 신들』의 합본이 『Complete Pegana』라는 제목으로 〈Call of Cthulhu Fiction〉이라는 제목의 총서 중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총서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비롯하여 그의 동료와 후배, 그에게 영향 받은 작가들이 쓴 크툴루 신화 관련 작품을 망라한 시리즈인데 여기에 던세이니가 들어간 것은 얼핏 이상하거나 어울리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전체적 분위기나 성격이 다른 이질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포함시킨 것은 크툴루 신화를 만든, 더 나아가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를 만들어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던세이니의 신화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해석하는 게 적합할 것 같다. 던세이니의 신화를 크툴루 신화의 일부로(혹은 그 반대로) 수용하려는 시도라는 의견도 있는데 조금 지나친 해석인 것 같아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겠다.
그리고 톨킨이다. TRPG인 D&D와 함께 우리나라를 포함한 현대 판타지 소설에 가장 크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그 역시 던세이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곳과 다른 세상(2차 세계)을 무대로 하며, 신을 만들고 신화를 빚어내는 판타지의 전통적인 창작 방법을 선보인 것이 던세이니이니까 톨킨이 그의 문학적 제자라고 해도 틀렸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이클 화이트가 쓴 톨킨 전기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던세이니의 작품을 탐독하여 열정적으로 빠져들었으나, 후일 그는 던세이니를 에세이 등을 통해 비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건 바로 던세이니의 작명법에 관해서인데, 언어학자인 톨킨은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인명, 지명 등을 언어학적으로 엄밀히 부합하도록 지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반해 던세이니는 즉흥적인 느낌이나 발음이 주는 어감만으로 지어 붙였기에 톨킨은 이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전기는 윌리엄 모리스에게서 받은 영향이 더 크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고어의 다용(thou, thee 같은)과 서사시와 같은 운율로 흠정역성서를 연상시키도록 만드는 문체는 분명 던세이니를 따라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현대 소설에서 일부러 고어를 써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표현방법은 던세이니가 시초라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본 필자의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톨킨의 비판은 던세이니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언젠가 넘어서야 할 벽으로서, 자신보다 먼저 앞길을 개척한 선배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니었을까.
◈ 페가나의 신들
본작은 로드 던세이니의 데뷔작이다. 유일하게 자비로 출간했는데, 큰 인기를 얻은 덕분에 같은 세계관을 다룬 속편 『시간의 신들』을 냈고, 이후에도 많은 장·단편을 발표하며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사실 본작의 세계관은 당시의 관점에 봐도 그렇게 복잡하고 폭넓지는 않다. 그리스나 북유럽 신화처럼 신들이 많지도 않고 다양한 모험을 펼치지도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역동적이 아닌 정적이고 사색적인 세계관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개성적이고 독창적임에는 틀림없으며, 오늘날에도 퇴색되지 않는 매력이 남아 있다.
이 세계와 신들을 만든 마나-유드-수샤이는 잠에 빠져 있는데, 사실 이 세계란 전부 그가 꾸는 꿈일 뿐이라 잠에서 깨어나면 신도 세계도 모두 사라지고 말 거라는 던세이니의 몽환적인 세계관이 당대 유럽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신마저도 그렇게 허무하고 무력한데 인간이야 말 할 것도 없다. 던세이니의 판타지는 그간 유럽의 문학과 예술이 보여줬던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일시에 뒤집는 문학적 혁명이었다.
전술했듯 이러한 세계관은 러브크래프트에게 큰 감명을 주어 크툴루 신화가 만들어지는 산파 노릇을 했으며, 세상의 창조와 신들의 이야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거대한 스케일의 2차 세계라는 개념은 톨킨에게로 이어져 완성된다.
본작은 던세이니의 작가 인생을 시작하도록 만든 계기였을 뿐 아니라 장르 판타지라는 거대한 숲을 만들어낸 태초의 싹이라 말할 수 있다. 황무지를 뚫고 솟아오른 그 작은 싹이 자라나 열매를 맺어 씨앗을 퍼뜨린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풍성한 숲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 번역에 대하여
로드 던세이니의 글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술했듯 중세 영어를 보는 듯한 표현과 시적인 문체 때문에 평범한 소설보다 훨씬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가령 thou, thee 같은 대명사나, speak의 과거형이 spake라든지, 3인칭 동사 끝에 ~eth가 붙는다든지, 대부분의 문장 첫머리에 And가 붙는다든지(이것 역시 흠정역성서와 마찬가지라고 한다) 번역에 까다로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따라서 본래는 경륜이 있는 번역자가 긴 시간에 걸쳐 공들여 번역하는 것이 원작에 걸맞은 대접이겠지만, 무자본 1인 출판사인 페가나에서 그렇게 하기란 불가능했다. 사실 던세이니의 위상이니 가치를 아무리 말해도 오늘날까지 거의 번역되지 않은 이유는 고풍스럽고 따분한 ‘옛날 글’이며, 상업적으로 ‘팔릴 글’이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번역도 오늘날의 느낌에 맞도록 이루어졌다. 굳이 고어나 옛 표현을 쓰지 않되 신과 예언자의 말투는 개정개역판 성서를 연상시키도록 했다. 문두의 ‘그리고’도 최대한 다른 표현으로 바꾸거나 생략했다(오늘날 소설에서 문장을 전부 ‘그리고’로 시작한다면 풋내기의 습작 취급을 받을 테니 말이다).
또한 역자가 비전공자여서 번역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편집자가 일본어 번역본(카와데쇼보에서 나온 문고판을 사용했다)과 대조하며 다듬었다. 저본인 구텐베르크판에 누락된 문장이 두 개 정도 있는데 일본어판의 해석을 기초로 채워 넣었다.
본작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고유명사도 일본어판을 참조했다. 작품 속의 명칭은 전부 작가 자신이 창작한 것이며 특별한 어원이나 법칙 없이 자유로이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발음에 대해 정해진 규칙이나 가이드 또한 없다. 언어를 새로 만들고 번역에 대한 지침까지 마련한 톨킨이 그를 비판한 이유가 짐작이 갔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본작에 대해 언급한 소수의 자료에서 ‘페거너의 신들’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보였기에 이를 따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사실 정확한 표기는 ‘Pegāna’로 첫 번째 a 위에 줄이 그어져 있어 아마도 가장 흡사한 발음은 ‘페가~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아프리카, 일본 등지의 신화와 전설에 관심을 가졌고 본작에도 영향을 끼친 점을 감안하여 발음은 일부러 조금 투박하게 정했다. 굳이 영어 발음을 살린답시고 ‘매너윳서셰이’라는 식으로 쓰는 것보다 지금 표기가 읽는 이에게도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양해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신들이 하는 게임’이라는 표현에서 이 ‘게임’은 원문에도 game이지만 ‘체스’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던세이니가 체스를 즐겼다는 점, 인간은 신들이 조종하는 체스의 말과 같다는 본작의 내용을 감안하면 체스로 옮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체스라고 옮기면 게임의 의미가 한정되어버리기 때문에 원문의 표현도 그렇고 일본어판의 의견(최초 번역판은 체스로 옮겼으나 카와데쇼보의 신역판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게임으로 옮겼다)을 존중하며 그대로 게임으로 옮겼다.
아직 오역과 어색한 표현이 많이 남아 있겠지만 언젠가 더 좋은 번역과 장정으로 던세이니가 우리나라에 소개될 날이 올 거라 기약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우선은 이것으로 참아주기를 부탁드린다.
페가나 북스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로드 던세이니의 작품을 최대한 많이 소개하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건 첫 작품인 본작의 성과에 달렸다. 부디 많은 성원과 애정 어린 질책을 부탁드린다.
“아일랜드가 낳은 몽상의 거장”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누구도 던세이니를 흉내낼 수 없지만,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흉내내보려 할 것이다.” - C.L. 무어
로드 던세이니는 문학적 위상, 특히 판타지 장르에서 차지하는 무게감과 위대함에 비해서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검색을 해도 아일랜드의 희곡 작가라는 정도의 소개만 나오며 국내에 번역 소개된 작품은 단편집에 수록된 한두 편 정도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 및 작품 선정을 하고 해설을 쓴 〈바벨의 도서관〉시리즈 중의 하나로 단편집이 나와서 소개 및 입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지금까지 그를 아는 사람은 판타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소수의 매니아밖에 없었다. 흔히 말하는 요즘 판타지 소설을 흥미 위주로 읽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며 흥미를 느낄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판타지라는 장르를 좋아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 더 나아가 판타지를 쓰는 사람이라면 로드 던세이니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장르 판타지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J.R.R. 톨킨, H.P. 러브크래프트, 로버트 E. 하워드, 어슐러 K. 르 귄 등의 작가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서 C. 클라크, 이나가키 타루호, 닐 게이먼 등이 그에게 경의를 표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너무 많아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작가와 작품이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고, 2차·3차 영향까지 포함한다면 현존하는 판타지 소설의 거의 전부라도 해도 좋을 정도다.
판타지는 SF나 추리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의하고 분류하기가 어려운 장르다(로맨스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는 논의로 한다). 비현실성, 환상성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고대의 신화와 민담까지도 전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범위를 좁혀서 『반지의 제왕』으로 대표되는, 중세 유럽과 흡사한 2차 세계를 무대로 하는 소설을 판타지라고 한정해보면 그 시초는 영웅설화, 전설, 민담과 서사시가 될 것이다.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고대에서 중세까지 민담과 설화, 동화가 구분되지 않은 채 섞여(동화를 영어로 페어리 테일, 즉 요정 이야기라고 한다는 걸 감안하면 동화와 판타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전래되다가 인쇄술의 발달로 소설이라는 형식이 널리 퍼지게 되고 근대로 넘어오면서 고딕 소설이 큰 인기를 얻게 된다. 판타지, 호러, 로맨스, 심지어 SF(『프랑켄슈타인』과 같은 프로토SF는 종종 고딕 소설로 분류된다)까지 혼재된 이 ‘프로토 장르’의 세례를 받은 로드 던세이니는 독자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냈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었다. 그리고 이를 현대적인 소설이라는 ‘포맷’에 맞추어 선보였으니, 바로 판타지 장르의 탄생이었다.
본 필자가 조지 맥도널드, 윌리엄 모리스와 함께 로드 던세이니를 ‘근대 판타지의 빅3’요 ‘판타지 장르의 원조’라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동화도 아니고 중세 로망스의 단순 번안도 아닌 성인을 위한 환상 세계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지 맥도널드는 그 시초가 동화이며(『북풍의 등에서』는 오늘날에도 고전 명작으로 칭송받는다), 윌리엄 모리스는 중세 로망스의 번역자이자 디자이너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는데, 그들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차적인 세계와 이야기를 지어내어 판타지라는 장르를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로드 던세이니는 군인으로 참전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귀족답게 평화롭고 우아한 삶을 살았다. 그는 여행과 사색을 즐겼고 에도가와 란포가 그랬듯 현실보다 꿈을 더 소중히 여겼다. 『페가나의 신들』의 독특한 세계관과 토속적인 인명 및 지명은 아프리카 지방의 여행, 그리고 일본 신화에 대한 흥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국의 전설과 문화가 유럽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큰 자극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던세이니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이를 들라면 바로 J.R.R. 톨킨과 H.P. 러브크래프트라 할 수 있다. ‘빛의 톨킨, 어둠의 러브크래프트’(이 표현은 본 필자가 지어내어 예전에 다른 글에서 썼다)이라 불리는 환상소설계의 두 거장이 공통된 문학적 스승을 갖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글에 반하여 던세이니의 세계관을 차용하거나 작풍을 모방한 단편을 쓰면서 습작을 했다. 오늘날 말하자면 팬픽션이나 2차 창작에 해당할 텐데,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일 크룰루 신화라 불리는 거대한 세계관에까지도 그 영향을 이어갔다. 즉 던세이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크툴루 신화를 제대로 해석이나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외계의 신들이 깨어나 돌아오기만 하면 인류 따위는 단숨에 사라질 수 있다는 크툴루 신화의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세계관은 던세이니의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본작과 『시간의 신들』의 합본이 『Complete Pegana』라는 제목으로 〈Call of Cthulhu Fiction〉이라는 제목의 총서 중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총서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비롯하여 그의 동료와 후배, 그에게 영향 받은 작가들이 쓴 크툴루 신화 관련 작품을 망라한 시리즈인데 여기에 던세이니가 들어간 것은 얼핏 이상하거나 어울리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전체적 분위기나 성격이 다른 이질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포함시킨 것은 크툴루 신화를 만든, 더 나아가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를 만들어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던세이니의 신화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해석하는 게 적합할 것 같다. 던세이니의 신화를 크툴루 신화의 일부로(혹은 그 반대로) 수용하려는 시도라는 의견도 있는데 조금 지나친 해석인 것 같아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겠다.
그리고 톨킨이다. TRPG인 D&D와 함께 우리나라를 포함한 현대 판타지 소설에 가장 크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그 역시 던세이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곳과 다른 세상(2차 세계)을 무대로 하며, 신을 만들고 신화를 빚어내는 판타지의 전통적인 창작 방법을 선보인 것이 던세이니이니까 톨킨이 그의 문학적 제자라고 해도 틀렸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이클 화이트가 쓴 톨킨 전기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던세이니의 작품을 탐독하여 열정적으로 빠져들었으나, 후일 그는 던세이니를 에세이 등을 통해 비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건 바로 던세이니의 작명법에 관해서인데, 언어학자인 톨킨은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인명, 지명 등을 언어학적으로 엄밀히 부합하도록 지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반해 던세이니는 즉흥적인 느낌이나 발음이 주는 어감만으로 지어 붙였기에 톨킨은 이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전기는 윌리엄 모리스에게서 받은 영향이 더 크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고어의 다용(thou, thee 같은)과 서사시와 같은 운율로 흠정역성서를 연상시키도록 만드는 문체는 분명 던세이니를 따라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현대 소설에서 일부러 고어를 써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표현방법은 던세이니가 시초라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본 필자의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톨킨의 비판은 던세이니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언젠가 넘어서야 할 벽으로서, 자신보다 먼저 앞길을 개척한 선배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니었을까.
◈ 페가나의 신들
본작은 로드 던세이니의 데뷔작이다. 유일하게 자비로 출간했는데, 큰 인기를 얻은 덕분에 같은 세계관을 다룬 속편 『시간의 신들』을 냈고, 이후에도 많은 장·단편을 발표하며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사실 본작의 세계관은 당시의 관점에 봐도 그렇게 복잡하고 폭넓지는 않다. 그리스나 북유럽 신화처럼 신들이 많지도 않고 다양한 모험을 펼치지도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역동적이 아닌 정적이고 사색적인 세계관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개성적이고 독창적임에는 틀림없으며, 오늘날에도 퇴색되지 않는 매력이 남아 있다.
이 세계와 신들을 만든 마나-유드-수샤이는 잠에 빠져 있는데, 사실 이 세계란 전부 그가 꾸는 꿈일 뿐이라 잠에서 깨어나면 신도 세계도 모두 사라지고 말 거라는 던세이니의 몽환적인 세계관이 당대 유럽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신마저도 그렇게 허무하고 무력한데 인간이야 말 할 것도 없다. 던세이니의 판타지는 그간 유럽의 문학과 예술이 보여줬던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일시에 뒤집는 문학적 혁명이었다.
전술했듯 이러한 세계관은 러브크래프트에게 큰 감명을 주어 크툴루 신화가 만들어지는 산파 노릇을 했으며, 세상의 창조와 신들의 이야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거대한 스케일의 2차 세계라는 개념은 톨킨에게로 이어져 완성된다.
본작은 던세이니의 작가 인생을 시작하도록 만든 계기였을 뿐 아니라 장르 판타지라는 거대한 숲을 만들어낸 태초의 싹이라 말할 수 있다. 황무지를 뚫고 솟아오른 그 작은 싹이 자라나 열매를 맺어 씨앗을 퍼뜨린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풍성한 숲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 번역에 대하여
로드 던세이니의 글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술했듯 중세 영어를 보는 듯한 표현과 시적인 문체 때문에 평범한 소설보다 훨씬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가령 thou, thee 같은 대명사나, speak의 과거형이 spake라든지, 3인칭 동사 끝에 ~eth가 붙는다든지, 대부분의 문장 첫머리에 And가 붙는다든지(이것 역시 흠정역성서와 마찬가지라고 한다) 번역에 까다로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따라서 본래는 경륜이 있는 번역자가 긴 시간에 걸쳐 공들여 번역하는 것이 원작에 걸맞은 대접이겠지만, 무자본 1인 출판사인 페가나에서 그렇게 하기란 불가능했다. 사실 던세이니의 위상이니 가치를 아무리 말해도 오늘날까지 거의 번역되지 않은 이유는 고풍스럽고 따분한 ‘옛날 글’이며, 상업적으로 ‘팔릴 글’이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번역도 오늘날의 느낌에 맞도록 이루어졌다. 굳이 고어나 옛 표현을 쓰지 않되 신과 예언자의 말투는 개정개역판 성서를 연상시키도록 했다. 문두의 ‘그리고’도 최대한 다른 표현으로 바꾸거나 생략했다(오늘날 소설에서 문장을 전부 ‘그리고’로 시작한다면 풋내기의 습작 취급을 받을 테니 말이다).
또한 역자가 비전공자여서 번역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편집자가 일본어 번역본(카와데쇼보에서 나온 문고판을 사용했다)과 대조하며 다듬었다. 저본인 구텐베르크판에 누락된 문장이 두 개 정도 있는데 일본어판의 해석을 기초로 채워 넣었다.
본작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고유명사도 일본어판을 참조했다. 작품 속의 명칭은 전부 작가 자신이 창작한 것이며 특별한 어원이나 법칙 없이 자유로이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발음에 대해 정해진 규칙이나 가이드 또한 없다. 언어를 새로 만들고 번역에 대한 지침까지 마련한 톨킨이 그를 비판한 이유가 짐작이 갔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본작에 대해 언급한 소수의 자료에서 ‘페거너의 신들’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보였기에 이를 따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사실 정확한 표기는 ‘Pegāna’로 첫 번째 a 위에 줄이 그어져 있어 아마도 가장 흡사한 발음은 ‘페가~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아프리카, 일본 등지의 신화와 전설에 관심을 가졌고 본작에도 영향을 끼친 점을 감안하여 발음은 일부러 조금 투박하게 정했다. 굳이 영어 발음을 살린답시고 ‘매너윳서셰이’라는 식으로 쓰는 것보다 지금 표기가 읽는 이에게도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양해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신들이 하는 게임’이라는 표현에서 이 ‘게임’은 원문에도 game이지만 ‘체스’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던세이니가 체스를 즐겼다는 점, 인간은 신들이 조종하는 체스의 말과 같다는 본작의 내용을 감안하면 체스로 옮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체스라고 옮기면 게임의 의미가 한정되어버리기 때문에 원문의 표현도 그렇고 일본어판의 의견(최초 번역판은 체스로 옮겼으나 카와데쇼보의 신역판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게임으로 옮겼다)을 존중하며 그대로 게임으로 옮겼다.
아직 오역과 어색한 표현이 많이 남아 있겠지만 언젠가 더 좋은 번역과 장정으로 던세이니가 우리나라에 소개될 날이 올 거라 기약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우선은 이것으로 참아주기를 부탁드린다.
페가나 북스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로드 던세이니의 작품을 최대한 많이 소개하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건 첫 작품인 본작의 성과에 달렸다. 부디 많은 성원과 애정 어린 질책을 부탁드린다.
2011년 10월
pilza2 (편집자, 페가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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