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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으로 출간한 『시간과 신들』을 맛보기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http://pegana.tistory.com/15
* 공개 기간 : 2012/06/16~(무기한)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http://pegana.tistory.com/15
* 공개 기간 : 2012/06/16~(무기한)
시간의 나라에서
IN THE LAND OF TIME
로드 던세이니 지음
엄진 옮김
어느 날 알랏타의 왕 카르니스가 장남에게 말했다.
“짐은 이 도시 준을, 황금 지붕과 처마 밑에 있는 벌들까지 전부를 너에게 물려주려 하노라. 또한 알랏타의 대지와 네가 소유하기에 걸맞은 다른 토지까지 물려주겠노라. 나의 강력한 삼군(三軍)은 진다라를 정벌하고 이스탄을 침공하여 오닌을 국경에서 쫓아내며 얀의 성벽을 포위하고, 그 너머에 있는 헤비스, 에브논, 카리다 같은 작은 나라들도 정복할 수 있을 터. 다만 이 군대로도 지나르와 대적할 수는 없다. 에이디스 강을 건너지도 못하지.”
그 후 알랏타 나라의 도시 준에서는 그 황금 처마 밑에서 카르니스가 숨을 거두었고, 그의 영혼은 선대 왕들의 영혼과 그 노예들의 영혼이 갔던 곳으로 떠났다.
카르니스 조가 신임 국왕이 되어 알랏타의 금속 왕관을 쓰고 준을 둘러싼 평원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삼개 군대가 에이디스 강을 건너 지나르와 맞서 싸우게 해달라고 아우성치는 걸 보았다.
그러나 신왕은 군대를 놔두고 왕궁으로 돌아와 밤새 홀로 철 왕관을 쓴 채 전쟁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동이 틀 무렵 그는 동쪽으로 난 궁전의 창을 통해 준을 넘고 알랏타 평원을 지나 이스탄 땅에 벌어져 있는 계곡을 희미하게나마 보았다. 고심하는 동안 작은 마을과 방목된 양들이 있는 들판 너머에서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후 태양이 떠올라 알랏타를 비추고 이스탄을 밝히자 알랏타와 이스탄 양쪽 모두 사람들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탉이 마을 안에서 몰려다녔고 남자들은 양떼를 몰고 들판으로 나왔다. 왕은 이스탄 사람들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자도 여자도 일하러 나오면서 서로 만났고, 거리와 논밭에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왕의 눈은 멀리 떨어진 이스탄을 향해 있었는데 여전히 집집마다 길고 곧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태양이 더 높이 올라 알랏타와 이스탄을 비추니, 꽃은 활짝 피고 새는 노래했으며 남자들과 여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준의 장터에서는 대상(隊商)이 상품을 싣고 이스탄으로 출발했고 알랏타로 들어오는 낙타들은 종을 울리며 지나갔다. 왕은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지금껏 해본 적 없던 깊은 고심을 거듭했다. 서쪽에는 아그니드 산맥이 에이디스 강을 보호하듯 성난 얼굴로 늘어서 있었다. 그 뒤에는 흉포한 지나르 민족이 사는 황량한 땅이 있다.
한참 후에 왕은 자신의 새로운 왕국으로 나와 〈옛 신들의 신전〉으로 갔다. 지붕은 산산조각이 나 있고 대리석 기둥은 부러졌으며 안쪽 성당에는 길다란 잡초가 자라있었다. 옛 신들은 기도도 제물도 잃어버리고 무시당하고 잊혀졌다. 왕은 신하들에게 누가 신들의 신전을 부수고 신들을 잊히도록 만들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원들이 대답했다.
“‘시간’이 그렇게 했사옵니다.”
그 후 왕은 우연히 등이 굽고 힘없이 절룩거리며 걷던 사람을 만났다. 그의 얼굴은 주름지고 지쳐 보였다. 왕은 자신이 나고 자란 궁정에서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에게 물었다.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는고?”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시간이 가혹한 짓을 했습지요.”
왕과 신하들은 앞으로 나아가 장의(葬儀) 마차로 시신을 옮기는 모습을 보았다. 왕은 신하들에게 죽음에 대해 상세히 물었다. 지금껏 이런 일들을 왕에게 설명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 중 연장자가 말했다.
“오, 국왕폐하, 죽음이란 신들께서 시종인 시간을 통해서 하사하신 선물이옵니다.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고 억지로 받는 이도 있나이다. 그것은 각자 삶의 도중에 갑작스레 떨어지지요. 시간이 신들로부터 받아온 이 선물을 갖고 인간은 어둠 속을 나아갈지니, 신들께서 그리 원하시는 한 다른 무엇도 소유할 수 없게 될 것이옵니다.”
왕은 왕궁으로 돌아와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과 신하들을 불러 모으고 시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물었다. 그들이 왕에게 말하기를 시간이란 황혼 때 드리우는 긴 그림자와 같이 우뚝 선 거상(巨像)과 같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세상을 활보하고 있으며, 신들의 노예로서 명령을 수행하고 있으나 일찍이 새로운 주인을 선택하여 시간의 옛 주인들은 죽고 그들의 신전은 잊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소신이 딱 한 번 본 적 있사옵니다.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어릴 적 놀던 정원에서였지요.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소신은 시간이 조그만 정원 문보다 높이 서있는 걸 보았는데 그 모습은 빛과 함께 희미하게 사라져갔고 소신과 정원 사이에 서서 소신의 기억을 빼앗아갔사옵니다. 그는 소신보다도 강대한 존재였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
“소신 역시 그 〈저희 집안의 적〉을 본 적이 있사옵니다. 놈은 소신이 잘 아는 들판을 건너 낯선 이의 손을 잡아끌고 저희 집으로 찾아와 선조들이 앉아 계셨던 곳에 앉았사옵니다. 그 후 시간은 집 주위를 세 바퀴 돌더니 잔디밭에서 활력을 주워 모으고 정원의 키 큰 양귀비를 죄다 뽑아내고는 지나가는 길마다 잡초를 뿌리며 기억 속 깊이 남았던 곳을 활보했사옵니다.”
또 다른 이가 말했다.
“어느 날 시간은 사막으로 가서 그 황폐한 땅에게서 생명을 가져가, 통곡하도록 만든 후에 도로 사막으로 덮어두었다고 하옵니다.”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다.
“소신도 어린이 놀이터에서 꽃을 따려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사온데 그 후에 그는 나무 사이를 지나가면서 몸을 구부려 나뭇잎을 한 장씩 땄사옵니다.”
또 다른 이가 말했다.
“소신은 옛 아마르나 왕국에 있던 사원의 폐허에서 달빛 아래 서있던 크고 시커먼 모습을 본 적이 있사옵니다. 한밤중이었지요. 그 얼굴은 살인자와 같았고 무언가를 잡초와 먼지로 덮으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사옵니다. 그 후 아마르나 옛 왕국의 사람들은 자기네 신을 잃어버렸사옵니다. 시간이 밤중에 웅크리고 있는 걸 보았던 이래로 그들에게는 신이 없습지요.”
그 사이에도 계속 멀리 도시 가장자리에서 지나르와 싸우고 싶다며 아우성치는 삼군의 웅성임이 들려왔다. 이에 왕은 군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자 학살자의 오명을 뒤집어쓰지는 않을 것이니라. 짐은 이스탄 위로 떠오른 아침 해가 똑같이 알랏타를 비추어주는 것을 보았고, 평화가 꽃들 사이에서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노라. 고아의 나라와 과부의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야. 대신에 짐은 너희로 하여금 알랏타의 적을 향해 맞서도록 할 것이니라. 준의 탑을 부수고 우리 신들을 추방하려는 진짜 적에게 말이다. 놈은 진다라와 이스탄과 성채로 둘러싸인 얀의 원수이기도 하며 헤비스와 에브논은 놈을 이겨낼 수 없을 테고 황량한 산맥 속에 있는 카리다도 놈에게서는 안전하지 못하지. 놈은 지나르보다 강대하며 에이디스보다 단단한 국경을 지닌 적이니라.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노려보고 그들의 신을 조롱하며 그들이 세운 도시를 탐내고 있도다. 그러니 우리는 전진하여 ‘시간’을 정복하고 알랏타의 신들을 놈의 손에서 구해내야 한다. 그리하여 승리와 함께 귀환하면 죽음은 사라지고 노화와 병도 없어질 테니, 우리는 준의 황금빛 처마 아래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니라. 벌들은 무너지지 않는 탑과 녹슬지 않는 박공 사이에서 윙윙거리겠지. 쇠퇴도, 망각도, 죽음도, 슬픔도 없어질 것이니라. 우리가 사람과 풍요로운 들판을 냉혹한 시간에게서 해방시켜주는 때가 오면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왕의 명을 따라 세계와 신들을 구하겠노라 맹세했다.
다음날 왕은 삼군을 거느리고 전진하여 수많은 강과 나라를 지나갔고, 가는 곳마다 시간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했다.
첫 날 그들은 얼굴에 깊은 주름이 진 여인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예전엔 아름다웠지만 시간이 다섯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었노라고 말했다.
시간을 찾아 행군하면서 많은 노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시간을 만난 적은 있으나 그 이상 아는 것은 없었고, 몇 사람만이 폐허가 된 탑이나 늙고 부러진 나무를 가리키며 그리로 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달이 바뀌도록 왕은 군대를 이끌며 언젠가는 시간과 만날 날이 오기를 바랐다. 때때로 그들은 아름다운 궁전이나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옆에서 야영을 했는데 적이 어둠을 틈타 신성함을 더럽히려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때로 그들은 거미줄을, 녹슨 자물쇠를, 지붕이 부서지고 벽이 무너진 집을 본 병사들은 시간의 발자국에 근접했다고 생각하고 서둘렀다.
몇 주가 흐르고 몇 주가 몇 달이 되도록 시간에 대한 보고와 소문은 끊이질 않았으나 찾아내지는 못했다. 군대는 긴 행군에 지쳐갔지만 왕은 늘 적이 손에 닿을 거리에 있노라고 말하면서 전진만을 재촉했고 결코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달이 바뀌길 거듭했고 왕은 이제 의욕을 잃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고, 결국 그들은 일 년간 행군을 하여 멀리 북쪽에 있는 아스타르마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수많은 지친 병사들은 부대를 탈주해 아스타르마에 정착하고 마을의 아가씨와 결혼했다. 이 병사들에게 의해 1년 정도 걸린 부대의 행진은 아스타르마에 도착했을 때까지의 일들이 확실하게 기록으로 남겨졌다. 군대가 마을을 떠나자 아이들은 환호하며 그들을 따라 거리를 달렸고, 5마일 정도 떨어진 언덕을 넘어가며 군대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후의 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기록의 남은 부분은 준에서 왕의 병사였던 어느 노병이 저녁 때 화롯가에서 들려주던 이야기를, 지나르의 사람들이 나중에 기억해낸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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