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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러란의 검
The Sword of Welleran
로드 던세이니 지음
엄진 옮김
타르펫(Tarphet)의 대평원이 하구처럼 키레시아(Cyresian) 산맥 사이에 펼쳐진 곳에, 험한 바위 그림자에 둘러싸인 듯이 오래전부터 메림나(Merimna)라는 도시가 있었다. 이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는 결코 없을 거라고 나는 꿈에서 메림나를 처음 본 이후로 여겨왔다. 경이로운 첨탑과 청동상, 대리석 분수, 화려한 전승 기념비, 널따란 거리 전부가 아름다움 그 자체에게 바친 것만 같았다.
도시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오십 보 정도 너비의 대로가 있고, 양쪽으로는 메림나 백성들 누구나 아는 역대 국왕들의 청동상이 늘어서 있다. 길의 끝에는 세 마리 청동 말이 끄는 거대한 전차가 있어 날개 달린 여신의 조각상이 타고 있다. 그 뒤로는 칼을 뽑아들고 전차에 탄 메림나의 옛 영웅 웰러란(Welleran)의 거대한 모습이 있다.
여신의 옷차림과 자세도 긴박하고 말들의 질주하는 자세도 생생해서, 마차가 당장이라도 달려들며 피어내는 흙먼지가 왕들의 얼굴을 뒤덮을 것처럼 보일 정도다. 도시에는 거대한 홀이 있어 그 안에는 메림나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상(彫像)과 돔의 둥근 지붕은 옛날에 죽은 석공이 남긴 기술의 장관이고 돔 위에는 롤로리(Rollory)의 조상이 앉아서 키레시아 산맥 너머의 너른 땅을, 그의 검을 아는 나라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의 옆에는 승리의 여신의 조상이 늙은 유모처럼 앉아서 패배한 왕들의 왕관으로 롤로이에게 씌울 황금 월계관을 만들고 있었다.
이곳이 메림나. 승리의 여신들의 조상과 전사들의 청동상이 있는 도시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쓰는 지금 메림나의 병법은 잊혔고, 사람들은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그들은 대리석 거리를 지나다니며 먼 옛날 메림나를 사랑한 이들이 손에 검을 쥐고 얻어낸 수많은 전리품들을 구경했다. 잠이 든 이들 대부분은 웰러란, 수레나드(Soorenard), 몸몰렉(Mommolek), 롤로리, 아카낙스(Akanax), 젊은 이라이네(Iraine)의 꿈을 꾸었다.
도시를 감싼 산맥 너머의 땅에 대해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웰러란이 검을 휘두르며 명성을 떨쳤던 무대라는 정도뿐이었다. 먼 옛날부터 그 땅은 메림나의 군대에게 쩔쩔매던 나라의 소유로 되돌아간 지 오래였다. 지금 메림나 사람들에게는 침략당하지 않는 도시와 영화로운 옛날에 대한 추억밖에는 남은 게 없다.
밤이 되면 그들은 사막 저편에 파수병을 배치해놓긴 하지만 그들도 늘 롤로리의 꿈을 꾸며 잠들곤 했다. 매일 밤 세 번씩 보라색 옷을 입은 위병이 등불을 들고 웰러란의 노래를 부르며 도시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위병은 늘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지만 그의 노랫소리가 평원을 넘어 가파른 산맥에까지 닿으면 사막의 도적들은 웰러란의 이름을 듣고는 자기네 소굴을 버리고 도망쳐버릴 것이다. 여명이 평원을 비출 때 메림나의 첨탑들은 화려하게 반짝여 별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위병은 웰러란의 노래를 계속 부르니, 곧 보라색 옷의 색깔이 바뀌며 등불은 빛을 잃고 만다. 하지만 위병은 성벽을 떠나 돌아가고 평원에 있던 파수병은 하나둘씩 롤로리의 꿈에서 깨어나 발을 끌며 차갑고 고요한 도시로 돌아갔다. 그러면 위협적인 요소는 북과 서와 남에서 메림나로 이어지는 키레시아 산맥의 면면을 넘어가고 침략 받지 않는 오래된 도시의 조각상과 비석들이 맑은 하늘 아래 드러났다.
모든 예술의 영광을 담고 황금과 청동이 가득한, 과거 이웃 도시를 억압했던 오만한 도시, 병법을 모두 잊어버린 사람들이 사는 이 도시를 무기도 없는 위병과 잠들어 버리는 파수병이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당신은 무척이나 놀랄지도 모른다. 현재 다른 모든 지역을 빼앗기고도 메림나 도시 자체가 안전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산맥 너머의 야만족들은 기이한 믿음에 두려워했는데, 메림나를 둘러싼 성벽 위에는 웰러란, 수레나드, 몸몰렉, 롤로리, 아카낙스, 젊은 이라이네가 여전히 그 장소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메림나의 영웅 중에서 가장 어린 이라이네가 야만족과 최후의 싸움을 벌인 게 약 백 년 전의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가끔 야만족의 젊은이들은 이런 의심을 입에 담기도 했다.
“영원히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면 신중한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너도 꽤 지혜로워졌구나. 들어보아라. 검을 든 기병 마흔 명이 그를 덮치면서 모두 그를 죽이겠노라 맹세했고, 그들 모두가 각자의 신에게 맹세를 했는데도 죽음을 피해간 남자가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봐라. 웰레란은 늘 그랬다. 또한 밤중에 성벽으로 둘러싼 도시 안으로 단 둘이서 쳐들어가서 그 도시의 왕을 제거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라. 수레나드와 몸몰렉은 해냈다. 그토록 많은 검과 그토록 많은 화살의 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자들이라면 시간과 세월에게서도 빠져나올 수 있을 거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얌전해지며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의심은 커져갔다. 키레시아 산맥에 해가 질 무렵이면 간혹 도시를 훔쳐보는 야만족들의 모습이 빛 속에서 검게 떠오르는 걸 메림나 사람들은 알아볼 수 있었다.
메림나에 사는 모두는 성벽 위에 있는 게 그저 돌로 만든 조각상임을 알지만, 여전히 언젠가는 옛 영웅들이 돌아올 거란 희망을 간직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죽은 걸 본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여섯 전사에게는 관례가 있었으니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죽음을 맞게 되면 말을 달려 깊은 협곡으로 가서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코끼리들도 작은 짐승들로부터 자기들의 뼈를 감추기 위해 비슷한 짓을 한다고 읽은 적이 있다. 협곡은 가파르고 좁아서 거대한 틈이라 할 수 있는데 누구도 발을 들이는 이가 없었다. 그곳에 상처를 입은 웰러란이 홀로 들어섰다. 그 뒤로 수레나드와 몸몰렉이 이르렀다. 몸몰렉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으나 수레나드는 다치지 않았기에 웰러란의 아름다운 뼈 옆에 사랑하는 친구를 눕히고는 돌아갔다. 그리고 때가 된 수레나드도 롤로리와 아카낙스와 함께 돌아왔다. 롤로리가 가운데에, 수레나드와 아카낙스는 양옆에서 각자 말을 몰았다. 긴 여로는 수레나드와 아카낙스에게는 힘들어 이내 지쳤다. 그들 모두 치명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롤로리에게는 쉬운 여행이었는데 이미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다섯 영웅의 뼈는 예전 괴롭힘을 당하던 나라인 적의 영토에 하얗게 변한 채로 남았다. 그 장소를 아는 사람은 몸몰렉 일행이 떠날 때 겨우 스물다섯이었던 젊은 대장 이라이네밖에 없었다. 그들 옆에는 안장과 고삐, 온갖 말의 장신구들이 흩어져 있다. 훗날 언젠가 이국(異國)의 누군가가 이것들을 발견하면 이렇게 말하리라.
“보라! 메림나 장수들의 안장과 고삐다. 전리품이구나.”
그러나 그들의 믿음직한 애마는 모두 자유로이 풀어주었다.
40년 후, 위대한 승리의 시기 속에서 이라이네는 치명상을 입었고 고칠 방법은 없었다. 그러자 최후의 대장이었던 이라이네는 혼자서 말을 몰고 떠났다. 어두운 협곡까지 긴 여로를 지나 이라이네는 옛 영웅들의 무덤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은 채 양손으로 안장을 붙잡고 말을 재촉했다. 가끔 말을 탄 채로 잠에 빠졌고 지나간 날들을 꿈에서 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웰러란과 함께 거대한 전쟁에 나섰던 일, 웰러란이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던 일, 전투 중에 진격을 명령하는 웰러란의 동료들의 얼굴을, 꿈에서 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위기를 맞은 육체 속에 맴도는 영혼 속에서 커다란 동경이, 옛 영웅들의 뼈 사이에 눕고 싶다는 갈망이 솟아났다.
마침내 평원에 난 상처와도 같은 어두운 협곡이 보이자 이라이네의 영혼은 깊은 상처에서 빠져나와 날개를 펼쳤고 고통은 상처 입은 육신과 분리되었다. 말을 앞으로 재촉하면서 이라이네는 숨을 거두었다. 늙고 충실한 말은 계속 나아가다가 갑자기 시커먼 협곡이 앞에 나타나자 떨어지기 직전에 끄트머리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러자 이라이네의 육신이 말의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의 뼈는 세월이 흘러 메림나의 영웅들의 뼈와 함께 뒤섞인 채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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