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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가나 북스의 전자책 『몽상가의 이야기』 일부를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 http://pegana.tistory.com/124
* 공개 기간 : 무기한

무익한 도시
The Idle City

옛날에 〈무익한 도시〉라 불리던 도시가 있었다. 거기서 사람들은 무의미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통행료 대신에 입구에서 무의미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나가 문가에서 문지기에게 무의미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면 방해받거나 상처 입는 일 없이 도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밤이 되어 도시의 왕이 깨어나 침실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죽은 왕비의 이름을 부를 때면 문지기들은 서둘러 문을 닫고 왕의 침실로 가서 바닥에 앉아 모아온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왕은 점차 마음이 진정됨을 느끼고는 도로 드러누워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문지기들은 살며시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한참이나 헤맨 끝에 나는 이 도시의 문에 이르렀다. 내가 들어가려 했을 때도 남자 한 사람이 서서 문지기에게 통행료를 들려주고 있었다. 문지기들은 남자와 문 사이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고 저마다 창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뒤로는 다른 여행자 두 사람이 따뜻한 자리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놈브로스(Nombros) 도시는 신들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유일신에게로 전향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외투로 얼굴을 가리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 언덕 사이의 안개 속으로 들어가 올리브나무 숲 사이를 지나 해넘이 너머로 나아갔지요. 이미 대지를 뒤로 한 그들은 몸을 돌려 황혼의 빛에 감싸여 반짝이는 자기네 도시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습니다. 반은 분노하고 반은 슬퍼하는 듯한 기색이었죠. 그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영원히 떠나갔지요. 하지만 신들은 낫을 든 사신(死神)을 돌려보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릴 버린 도시의 반을 죽이도록 하라. 허나 절반은 자기들이 버린 옛 신들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살려두어라.’
그러나 유일신은 자기야말로 진정한 신임을 보이기 위해 파괴의 천사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시로 가서 주민의 절반을 죽이도록 하라. 허나 남은 절반은 내가 진짜 신임을 알 수 있도록 살려두어라.’
그리하여 파괴의 천사는 즉시 손에 검을 들고 깊은 숨을 내쉬며 검을 뽑아들었습니다. 굵은 참나무를 향해 첫 도끼질을 하기 직전의 나무꾼과도 같은 한숨이었죠. 거기서 천사는 양팔을 아래로 뻗고 머리를 그 사이로 숙이고 천국 끝에서 똑바로 아래를 향해 떨어졌습니다. 날개를 접고 발목의 반동으로 아래로 뛰어내렸지요. 그렇게 천사는 저녁 하늘을 지나 땅으로 향해 비스듬히 내려왔으니 검을 앞으로 뻗어 사냥꾼이 던진 투창이 솟았다가 막 땅으로 떨어지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막 땅에 닿기 직전에 날개를 펼치고 머리를 들어 놈브로스 도시를 둘로 나누는 넓은 플라브로(Flavro) 강둑에 내려왔습니다. 강둑에 내려오며 천사는 날개를 서서히 펄럭였는데 마치 추수를 끝낸 옥수수밭 위에서 작은 생물들이 무방비하게 있는 모습을 보는 매와 같았습니다. 동시에 반대쪽 강둑에는 신들이 보낸 사신이 내려왔지요.
즉시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는데 천사는 사신을 노려보았고 사신은 흘겨보며 맞섰습니다. 천사의 눈에는 붉은 불길이 이글거렸고 사신의 텅 빈 눈구멍 속에선 안개가 서려 있었지요. 갑자기 둘은 검과 낫을 맞부딪쳤습니다. 천사가 신들의 신전을 빼앗아 유일신의 증표를 남기니, 사신은 유일신의 신전을 붙잡아 신들의 의식과 제물을 바쳤습니다. 몇 세기가 흐르면서 플라브로 강은 바다로 흘러갔지요.
그리고 지금도 신들의 신전에선 유일신을 숭배하고 있고 유일신의 신전에선 신들을 숭배하고 있으며, 아직도 천사는 환희의 성가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사신 역시 죽은 신들과 함께 죽음을 맞으러 돌아가지 않고 있지요. 놈브로스 전체에서 그들은 싸우고 또 싸워 지금도 플라브로 강 양쪽에서 도시는 살아있지요.”
이에 문가의 문지기들이 말했다. “들어오시오.”
다른 여행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후헨와지(Huhenwazy)와 닛크라나(Nitcrana) 사이에 커다란 잿빛 구름이 떠있었습니다. 거대하고 신성한 산이며 봉우리들의 왕인 후헨와지와 닛크라나는 구름을 환영하며 형제라 불렀지요. 높은 하늘에서 고독하게 지내던 구름 또한 동료를 만나 환대를 받으니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안개가 대지의 안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 생겨난 형체는 대체 무엇이며 어째서 닛크라나와 후헨와지가 있는 곳으로 간 거지?’
그러자 대지의 안개가 저녁 안개에게 대답했습니다. ‘저건 그저 미쳐버린 대지 안개인데 따뜻하고 안락한 땅을 떠나간 것이다. 미치는 바람에 자기가 있을 곳은 후헨와지와 닛크라나라고 여긴 거야.’
저녁 안개가 말했습니다. ‘한때 구름이란 게 있었는데 아주 아주 옛날 일이지. 우리 선조님들이 하신 말씀이야. 아마 그 미친 녀석은 자기가 구름이라고 여겼던 걸 거야.’
그때 따뜻하고 두터운 진흙 속에서 나온 지렁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대지 안개여. 그대야말로 구름이며 그대 외에 구름은 달리 없사옵니다. 후헨와지와 닛크라나에 대해서라면, 저는 그들을 볼 수 없으니 그렇게 높지는 않을 것이며 제가 매일 아침 진흙 깊숙이에서 쌓아 올리는 것 이외에 세상에서 산 따위는 없을 겁니다.’
대지 안개와 저녁 안개는 지렁이의 말에 기뻐하며 그들의 말을 믿고서 동쪽을 바라보았지요.
그러니 진실로 대지 안개처럼 밤에는 따뜻한 진흙 근처에서 지내고 지렁이의 편안한 말을 들으며, 좋을 것 없는 높은 곳에서 헤맬 일도 없이, 만년설이 쌓인 산의 외로움 따위는 내버려두고, 도시 인간들의 여러 측면에서 그리고 이름 모를 머나먼 신들의 황혼을 듣는 속삭임으로부터 얻어지는 편안함을 모으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이에 문가의 문지기들이 말했다. “들어오시오.”
이어서 서쪽에서 온 남자가 일어나 서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마에는 한때 신들이 사랑했던 고대 신전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습니다. 길은 큰 벽 위를 지나고 분홍과 하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신전 바닥은 아래에 있었지요.
그 신전 바닥에는 굶주린 고양이 열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말했지요.
‘한때 여기선 신들이 살았고 한때는 인간들이 살았으며 지금은 우리 고양이들이 살고 있지. 그러니 다른 인간들이 오기 전에 따뜻한 대리석 위에서 햇볕을 쬐면서 즐기자꾸나.’
내 상상이 그들의 말없는 목소리를 들었던 건 어느 따뜻한 오후의 일이었지요.
엄청나게 깡마른 열세 마리 고양이가 나를 생선 가게 곁으로 이끌었고 물고기를 잔뜩 사도록 만들었습니다. 신전에 돌아와 그걸 전부 큰 벽 너머로 던졌지요. 30 피트 정도 높이에서 신성한 대리석 바닥 위로 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지금 로마 이외의 도시였다면, 혹은 다른 고양이들이었다면 천국에서 물고기가 떨어지는 광경에 엄청나게 흥분하고 감탄하며 기적으로 여겼겠지요. 그들은 천천히 일어나 몸을 쭉 뻗더니 느긋하게 물고기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이건 그냥 기적일 뿐이야.’ 고양이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문가의 문지기들이 말했다. “들어오시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