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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가나 북스의 전자책 『해이기 - 일본 환상소설 단편집 2』 일부를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 http://pegana.tistory.com/108
* 공개 기간 : 무기한

5
“저기, 잠깐, 할 말이 있어.”
아내가 불러 세웠다.
산노스케는 도망가려는 것처럼 발을 쭉 뻗은 채로 말했다.
“내는 호외로 바쁘다. 호외요!”
“잠깐만, 저기, 얘, 기다리라니까.”
몸을 일으켜 뒤쫓아가니 녀석은 다섯 걸음 정도를 단숨에 뛰어나갔다가 몸을 움츠리더니 서있는 아내의 앞치마 부근을 둥근 이마로 때리며 “이야!” 소리쳤다.
발을 내딛다가 돌연 부딪친 아내의 몸은 앞으로 가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뭐니, 또! 깜짝 놀랐잖아.”
“헤헤헤. 만날 이런다. 겁쟁이다.”
“아, 네. 산짱은 강하시니까요. 강하니까 그렇게 울상을 짓는 이유를 말해봐.”
“강하니까 울상을 짓는 이유……?”
녀석은 조심스레 따라서 말하더니 눈이 빡빡한 듯 연신 깜빡였다.
“말도 안 된다. 강하니까 울상을 짓다니, 누가 강한데 울상 따위를 짓겠노.”
“그럼 역시 넌 겁쟁이구나?”
“그치만 누님예, 울상을 짓지 않고선 밤새 망념(亡念)의 불이 붙은 배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 기라. 리에무(理右衛門)도 네가 울상을 짓는다고 말해갖고 이래봬도 그럴 때는 염불을 외운다고.”
산노스케는 고집스럽게 눈을 부릅떴다.
아내는 불안과 걱정으로 가슴이 턱 막혀서 재차 따졌다.
“뭐라고 했니, 망념의 불이 붙었다고?”
“아이고……!”
산노스케는 깜짝 놀란 듯 입을 눌렀다.
“입 다물자, 다물자.”
슬쩍 미소를 띠면서 시선을 피했지만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내는 일부러 토라진 척을 했다.
“알았어. 얼마든지 그렇게 숨기려무나. 어차피 산짱은 타인이니까. 오하마의 신랑이 아니니까.”
어깨를 늘어뜨리고 몸을 기울이며 아내는 등을 돌렸다.
녀석은 말뚝을 박는 듯이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와 그라노! 누님예, 감추려고도 했던 게 아이라고요.
우리 헹님도 그렇게 말했고 함께 탔던 사람들도 누님에겐 비밀로 해라, 얘기하면 무서워 하니까, 라고 해서 그랬다카이.”
“그래서, 모두가 감추니까 적어도 산짱이 들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
“으음. 그럼 얘기할까……. 내가 말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누가 그런 말을 할 것 같아?”
“오하마에게도 비밀이데이.”
녀석은 슬쩍 발돋움하여 툇마루에서 골방의 모기장을 슬쩍 훔쳐본다.
“아기가 뭘 안다고.”
“그래도 꿈에서 보면 가위 눌린다.”
“잠깐, 그렇게 무서운 일이야?”
아내는 방의 기둥을 붙잡았다.
“응, 내가 울상을 짓고 리에몬이 염불을 읊을 정도의 사건이니께. 들어봐라, 누님. 올해 5월, 사흘간 나갔던 다랑어잡이 배에서 이틀 밤을 바다에서 묵었어. 그중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다.
들판도 산도 안 보이는 막막한 바다 위에서 저녁을 먹은 후였을 기라.
낮부터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려와서 다들 선실로 들어왔고 센타(千太)놈이 노를 저었는데.
갑자기 어 추워, 어 추워, 감기 걸리는 건 싫어,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고물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어.
배는 흔들흔들 했지만 그 정도로 멈출 듯한 파도가 아닌 기라. 풍덩풍덩, 첨벙첨벙. 육지에서 100리인지 50리인지 방향도 전혀 몰랐다 아이가.”
아내는 고개를 끄떡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눌렀다.

6
“저녁 반찬에 젓갈이 너무 많았나보다, 어디 이슬비라도 마실까, 라면서 리에무 할배가 교대로 노를 저었어.
여, 무섭구나 센타, 나 그걸 보고서 도망갔었어, 라고 선미에서 할배가 말하는 것을 듣고 바보 같은 소리 하네, 정말로 한기가 돈다니까, 라면서 센타는 머리까지 솜옷을 덮으면서 뒹굴었어.
‘호이, 아, 호이’ 파도 속에서 희미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이가.
어디서인지 모르고 가까운 듯 들리면서도 먼 데서 들려왔어.
왔다, 왔다, 운수가 나쁘다 했더니! 나 진짜 아랫배가 아파오는데. 거기 누구든 와줘, 계속 웅크리고 있었더니 힘줄이 당겨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라고 말하면서 반시간도 안 되어 리에무 할배가 빠져나갔어.
내는 저기 두통이야, 내는 그 각기병이다, 라는 등 다들 괴로운 얼굴을 하고 나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가.
그때 이 집 헹님이 어이, 네가 저어, 라고 말하니까 내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내한테 맡겨달라고 캤지.”
녀석은 머리띠를 단단히 동여매는 흉내를 냈다.
“갑작스레 선미로 달려 나갔더니 배가 파도 위에 걸려 있다가 비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기라.
영차, 하고 소리를 내며 느티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만든 듯한 커다랗고 묵직한 노라는 놈을 치켜들었지. 비가 쓸쓸히 머리띠를 적실 뿐 하늘인지 물인지 알지도 못했다. 낮에 멀리 보이던 산 위를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처럼 밑바닥이 요란하게 솟아 돌아오는 기 아이겠나.
‘아, 호이, 호이, 아호이’ 하는 이상한 소리가 시커먼 바다에도 구석이 있어 그 구석 쪽에서 들려왔던 기라.
서로 향하면 서쪽에서, 남으로 향하면 남쪽에서, 어디에서도 내가 있는 쪽으로 들렸다. 물결의 이랑이랑 동일하게 목소리가 떠올랐다 가라앉고 멀어졌다가 가까와지고.
그러다 꾸물꾸물 불이 타올랐어. 배에서 바다로. 저 시커먼 안쪽으로. 불룩불룩 커다란 거품이 솟아나는 것처럼 확 빛을 내면서.
야, 불이 밝히고 싶었나봐. 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쳤는데…… 누님예.”
“어어?”
아내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닥쳐, 닥쳐, 라고 리에무 할배가 선실에서 소리치는 기 아이가.
또 센타가, 저건 육지의 도깨비불인데 열다섯까지 보지 않으면 평생 보지 않게 된다던데 열세 살에 보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된다, 라고 말하는 기라.
내가 그 말을 들으니 노를 쥔 손목이 차가워졌다 아이가.”
“……참 힘들었겠다. 그래서 울상을 지었던 거구나. 무리도 아니지. 무섭네.”
귀밑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아내는 몸을 떨었다.
“그, 그치만 내는 오하마의 신랑이라 이기다. 이 정도에 울상 따위 지어서 되겠나?
불꽃인지 이상한 불인지가 타고 또 타면서 이쪽으로 올 것 같아서 노 젓기를 멈추고 노를 놔둔 기라.
누님예, 그러니까 그 불이요, 커다란 파도 모양을 하고서 머리보다 높아져서 배 밑바닥으로 벼랑이 생기도록 가라앉거나, 뭉실뭉실 굴러다니며 배 밑에 달라붙고, 바다뱀이 꿈틀거리듯 따라오는 기 아이겠나.”
“…….”
“거기다 뭐고, ‘아, 호이, 호이, 아호이’ 라는 듣기 싫은 슬픈 목소리가요, 불이 뜰 때는 아래로 가라앉고 불이 가라앉을 때는 위로 떠오르면서 위아래로 들썩이며 멀리에서 귀에 들려왔던 기라.”

7
“누구든, 휴, 나랑 똑같았을 기다. 그 불꽃이 다가왔으니까.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노를 붙잡고 얼른 저어봤지만, 휴, 어림없었다.
저쪽도 그만큼 빨라지는 기라.
이건 뭐, 하는 수 없다, 라고 중얼거리곤 쭈그리고 웅크린 채로 덜덜 떨며 보고 있었더랬다. 그랬더니 다가와서 둥실 뜨더니 새처럼 뱃머리 위로, 물 위를 떠나 높아지는 기 아이겠나. 센 바람을 맞으면서 점점 커졌다고. 또 일그러지면서 둥근 모양이 되더니 노란색을 띠며 희부연 그림자가 비쳤다. 커다란 배는 뱃머리부터 몸통 사이에 걸쳐 반이 노랗게 되었지. 소매를 펼치고 무릎을 세우고 뛰어오른 모양이 여자인가 싶었다. 그치만 크기는 커도 노를 들어서 건드려보니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기라.
나는 으악, 하면서 노를 놓았다.
그때인갑다. 내 얼굴은 창백하고 네 얼굴은 노랗다면서 선실 안에서 저마다 떠들어댔다. ……아야카시(あやかし 배가 난파할 때 나온다는 괴물) 불이 지나갔어.
야, 말없이 저어, 딴 생각 하지 마, 라고 이 집 헹님이 말씀하시는데 우짜겠노. 내야 시키는 대로 하면서 몰래 그 불을 보았지.
어렴풋이 노란색이 밑바닥 쪽에서 부글대며 무언가 움직이드라고.”
“뭐? 뭐야, 뭔데, 산짱.”
아내는 조급하게 졸랐다. 이야기를 듣는 아내는 차양 그늘 아래. 양지에 있는 산노스케는 저물어가는 가을해의 노란색 속에서 거무스름해졌다.
“뭔지 전혀 모르겠다. 눈불개복(赤目鰒)의 내장을 빼내어서 내동댕이친 것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데이.
엄청 시뻘건 거나 푸르스름한 것이 점점 갑판에 달라붙는 것처럼 보였어.
그러다 쑥 떨어져서 바다에 떨어져 빙글빙글 돌더니 파도를 타고 멀리로 사라져버렸다. 물고기 눈이 번득이는 것처럼 휙 하고.
내 어깨도 가벼워지면서 배는 슬슬 미끄러져 갔다. 선실은 조용해지고 낮게 코고는 소리도 들려왔고. 밤은 무섭게 깊어갔지만 파도도 평탄해지면서 내도 한숨을 토해내었지.
그때 그게 또 숨을 토해내는 기 아이겠나.
‘아호이, 아호이’ 하면서 귀 근처에서 부르는 기라.
말없이 노를 저어, 라고 헹님이 그러시는지라 내는 조금도 울지 않았지만 뱃속에선 슬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카이.
듣기 싫다고 머리를 저으며 귀를 달래었지만 젠장, 배에 달라붙은 불을 부른 기 아이겠나.
파도가 가라앉아도 여전히 힘들었지. 불 녀석들, 두둥실 떠있더니 그때는 내가 노를 젓는 쪽에서예, 부글부글 헤엄쳐 오더니 갑자기 확 넓어지는 기라.
그 근처 파도에서 노랗게 빛이 났다.
그 속에서, 으윽, 가늘고 미끈거리는 검은 배가 떠올랐다 아이가.
도깨비불이 붙은 밤에 상어 녀석이 그렇게 변한다고…… 나중에 할배가 말해줐다.
그러고 보니 눈이 있었지. 새빨간 불 두 개가 허공에 뜬 것처럼 그놈의 뾰족한 끝부분에서 노려보고 있었는데, 잠시 있었더니 커다랗던 괴물 상어놈이 먼지가 된 것처럼 갑자기 사라지고 백 개 천 개의 수도 못 헤아릴 여러 가지 물고기가 우글우글우글우글 노란 파도 위를 나아가는데, 여기가 당(唐)나라의 바다인지 천축(天竺)의 바다인지 네덜란드의 바다인지. 그래도 그런 정도로 울지는 않았다.”
녀석은 단숨에 용기가 솟았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의 모래산 아래에 있는 마주보는 맹수는 억새풀과 함께 검어지고, 바다와 하늘은 노란색을 띤 붉은색이 된다.

8
“그러는 동안 또 잔재주를 부리는 건지,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싶더니 도깨비불 놈이 아래쪽에서 거품을 내면서 파도 이랑을 건너와 이번엔 우리 배의 키에 매달리더니 불길을 뿜어내는 기라.
난 눈을 감았지만 코끝까지 왔던가베. 선미에 스며들어오면서 그쪽이 전부 타버려서, 내가 갖고 있는 노를 붙잡으려 하니 손톱색까지 노랗게 되면서 눈알도 역시 그 색에 물들었지. 거칠게 뱃전을 때리는 파도도 배도 노란색이었다. 누님예, 그게 금색이 되어 빛난다면 돈이라도 되니까 좋았겠지만 도깨비불이니까 그렇지도 않았다 안카나.
때때로 연기 비슷하게 되면서 배의 형체가 사라지더라고. 파도가 시커먼 이랑이 될 때마다 괴물놈이 숨을 쉬며 또 불타는 기라.
내는 죽도록 노를 저었지만 불 녀석이 배에 얽혀있어서, 휴, 여자의 소매가 휘감긴 것처럼 보였는데, 할아버지의 허리띠가 감긴 것 같기도 했다. 커다란 아귀가 뱃속으로 장례식용 초롱(白張提灯)을 통째로 삼킨 듯도 했다카이.
이런 젠장, 염병할, 그라믄서 내는 발을 동동 굴렀지. 키에 붙었나보다, 라고 리에무 할아버지가 말해드라. 뒤집혀졌어, 안 되겠는데, 하고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마츠코(松公)가 말했고.
그 도깨비불 속을 들여다보았더니 망자가 얼마나 많은지, 지옥의 꼴을 봤다, 라고 센타가 말했거든.
꼬맹아, 멍청한 소리하지 말그라, 라고 이 집 헹님이 말씀하셨고.
내는 고마 참을 수가 없어서 울상을 짓고서 으아아앙 하고 울어삤다.”
이유는 제대로 들었으나 아내는 말도 없이 입술색이 파래져 있었다.
“선실에서 나오는 게 이 집 헹님인 걸 가까이에서 보고 알았다.
내한테 주고 니는 자라, 그렇게 말씀하시곤 손바닥에 훅 하고 손을 내뿜었던 기라.
금방 갈 끼다, 얌전히 있으라, 라고 말하곤 노를 잡고 똑바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거든. 내도 물러나 지붕창을 올려다보았더니 온통 새빨갛게 흐렸다. 파도가 시커먼 바다거북을 겹겹이 쌓아서 누운 것 같았다.
내는 선실로 굴러 들어왔지. 여기에도 열 명 정도가 몸을 움츠려 뒹굴고 있었던 기라.
어딘지도 모를 바다 한복판에 있는 배 한 척에서 눈앞에 괴물에게 둘러싸인 데다가 급기야 폭풍우까지 오고 있으니, 활발히 움직이는 건 여기 헹님 딱 한 명이라 생각하니 불안했지만 헹님은 뱃사공, 이런 때 필요한 뱃사공 아이겠나.”
아내는 이야기에 빠진 듯 “아, 그렇지.” 하며 깊은 한숨만 쉬었다.
녀석은 거만하게 으쓱거리곤 귀에 작은 손을 쳐들었다.
“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는데 절의 큰 종을 하루 종일 지붕 위에서 치는 것 같드라.
꾸벅꾸벅 그렇게 잠들었지. 씨름을 하다가 간단히 내던져 진 꿈을 꾸며 눈을 떴더니 배 안은 홍수였던 기라. 고인 물을 퍼내는 것도 힘들었다. 배도 사람도 아주 빙빙 돌았다 아이가.
지붕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리고, 무서운 소리가 들려 비가 오나 싶었더니 지붕창에서 물이 쏟아지고, 시커먼 바다괴물놈, 배 앞에도 뒤에도 오른쪽도 왼쪽도 수십 마리인 기라. 뻔뻔스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잡고 달려드는데, 손을 들면 소매 안에서, 입을 벌리면 목구멍에서 솟아나는 새하얀 물기둥이 쏴쏴 뿜어져 나오면서 배를 노리며 덤벼드는 기라.
‘아호이, 호이’ 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귀에 달라붙으려는 듯이 들려왔드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