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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가나 북스의 전자책 『해이기 - 일본 환상소설 단편집 2』 일부를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 http://pegana.tistory.com/108
* 공개 기간 : 무기한

2
유키에는 혼자서 슬쩍 빠져나와 창고 2층으로 향했다. 창문 쪽에 있는 인형 상자 앞에 와서 장지문 정도 크기의 켄돈(けんどん 뚜껑을 빼고 끼우는 상자) 뚜껑을 열고 보니 인형은 겨울옷을 입고 있었는데 금가루가 칠해진 마루오비(丸帯 천을 두 겹 접어 만든 허리띠)가 풀려 가슴께에 감겨 있었다. 그리고 청회색 옷감에 주홍색 겐지샤(源氏車 바퀴를 닮은 문양)를 그린 후리소데를 갈아입는 도중인 것처럼 슬쩍 어깨에 걸쳐입어, 요염한 밤 벚꽃과 현란한 반야(般若 무서운 얼굴의 여귀)의 춤추는 모습을 등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소매 가득 물들인 붉은 비단제 긴 속옷이 보였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옆에 있는 옷걸이를 보니 거기에는 두 가지 여름옷만이 긴 속옷과 내복까지 갖춰져 지금이라도 쓸 수 있을 듯한 모습으로 나란히 걸려 있다. 인형 양옆에는 초롱이 늘어서 있는데 시험 삼아 안을 들여다보면 등을 켰던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다. 걸상도 나와 있다. 재떨이에는 궐련 껍질이 몇 개인가 떨어져 있다. 인형 다리 바닥에는 깃이불이랑 방석이 흩어져 있어 누군가가 잠을 잔 모양이었다.
유키에가 너무나 이상한 기분으로 그 근처의 모양을 보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사람 발소리가 들렸다. ‘나누던 대화의 결론이 나서 그 많은 연기자들이 자기 옷을 고르러 온 건가? 좋았어, 입으로만 강한 척 하는 겁쟁이 미타니를 놀래야지’ 그렇게 생각한 유키에는 창고 반대쪽 구석에 기대어 놓은 병풍 상자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은밀했기에 고양이의 걸음소리처럼 엿듣기 힘들 정도였다. 중간까지 왔다가 당황하여 되돌아가 입구 문을 닫고 오는 듯했고, 이번엔 촛대에 불을 붙여 들고 계단을 끝까지 오르더니 돌연 불을 꺼뜨렸다. 그리고는 굵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유키에가 그늘 안에서 슬그머니 나와 확인해보니, 방금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던 타키오였다.
“코토지(琴路)님!”
타키오는 그런 식으로 인형의 이름을 불렀다. 어째서 혼자 장난을 치고 있는 걸까 생각하며 유키에는 눈을 부릅뜨고 주의하여 지켜보았다. 타키오는 장난은커녕 숨을 참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흥분한 기색으로 눈을 빛냈고, 미세하게 온몸을 떨면서 인형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늘 잠이 덜 깬 눈을 하고 있어서 저건 신경쇠약임이 틀림없다고 유키에가 염려를 했던 타키오가, 지금 보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생생하고 기묘한 모습으로 마치 연극에 도취한 듯이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만나고 싶어서…… 밤이 되는 걸 기다릴 수가 없어서 몰래 왔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동안에 짧은 밀회를 나누고 싶군요.”
연극의 대사를 읊는 듯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가 싶더니 몸을 날려 인형에게로 달려갔다.
타키오는 인형과 함께 솜이불 위로 쓰러지며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 나쁜 신음소리를 내고만 있었다.
유키에는 갑작스레 “왁~!” 하고 외쳐 놀래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에 슬며시 자세를 취했으나, 미타니 일행과 다르게 평소에 그토록 진지한 사람이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꾹 참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기괴한 행동을 보는 걸 견딜 수 없어서 눈을 깔고 숨을 죽였다.
‘매일 밤 이런 곳에 와서 날이 밝을 때까지 인형과 놀았단 말이야?’ 유키에는 생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괴한 사람이다. 신화시대에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인물이 있고, 또 호프만의 소설 중에도 인형과 사랑에 빠지는 박사의 이야기(E.T.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를 가리킨다)가 있으며, 또한 히다리 신지로(左甚五郎)의 〈경인형(京人形 인형이 춤을 추며 남자를 홀린다는 내용의 가부키극)〉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런 무생물에 절실한 육감을 느끼는 피그말리오니스트라 불리는 변태는 아마도 전설이나 황당무계한 연극 속 인물로만 존재할 거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니, 아무리 봐도 불쌍한 광경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유키에는 불쌍함을 넘어서 기분 나쁘다기보다 오히려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 서있기조차 힘들 것 같았다.
비가 갑자기 거세게 몰아쳐 창밖은 물안개로 자욱했다. 지금이라고 생각한 유키에는 그늘 사이로 숨을 죽인 채로 도망쳐 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