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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가나 북스의 전자책 『해이기 - 일본 환상소설 단편집 2』 일부를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 http://pegana.tistory.com/108
* 공개 기간 : 무기한

밤의 기적
마키노 신이치
夜の奇蹟 / 牧野信一

1
바닷가 패거리는 비가 오는 날이면 다들 이케베(池部)의 집으로 모이는 게 습관이었다. 주로 여름방학인 대학생들이었다.
마작에 열중하는 무리가 하나 있었다. 창틀에 걸터앉아서 만돌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제일 연상인 이케베였다. 이케베는 학교를 나온지 벌써 3년이나 지났지만 이 오랜 가문의 장남으로 딱히 일할 필요도 없었기에 천문학에 관한 책 등을 읽으며 조용히, 하지만 간혹 우울한 날을 보내는 처지였다.
“이렇게 비가 계속 오면 그냥 도쿄로 돌아가 버릴까?”
방구석 쪽에 누워 있던 젊은이가 갑자기 큰소리로 하품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그 남자는 이렇게 집에서 뒹굴고 있음에도 수영복을 입은 채였고, 지금까지 굉장한 소리로 코를 골면서 잘도 자고 있었지만 말이다.
“돌아가려면 지금 당장 가는 게 좋아. 타카시(隆)짱 같은 야만인이 없어지면 후련하고 좋지.”
유키에(雪江)는 툇마루에 있는 탁자에서 트럼프로 혼자 점을 쳐봤으나 카드를 늘어놓기만 해놓은 채로 그런 혼잣말을 한 젊은이에게 반격을 쏘아붙였다.
“쳇, 심한 소리를 다 하네. 내가 야만인이면…… 그래, 신사다운 사람은 저기 있는 이케베 씨 혼자밖에 없는 거 아냐?”
“아냐, 아키라(彰) 씨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 그래!”
젊은이는 애초에 자신이 경솔했음을 대담하게 이용하여 웃으며 말했다.
“타키오(滝尾) 씨라는 성인이 있구나. 너무 얌전해서 그만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지 뭐야.”
“유키에……”
그때 이케베가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타키오는 비오는 날만 해안으로 산책을 간다고 말했는데, 정말이야?”
“거짓말이야. 여전히 별실에서 자고 있거든. 모두가 와있으니 함께 놀지 않겠냐고 내가 좀 전에 물어보러 갔었는데……”
유키에는 그렇게 말하다가 카드를 내던졌다.
“쳇, 이건 또 안 되겠어!”
그리고는 오빠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리 일으켜도 조금도 눈을 뜨지 않는 거야. 그래도 타카시짱처럼 자는 모습이 보기 싫은 사람과는 달라서……”
“뭐야, 또 나냐? 재미없어.”
“……예의가 바르게 위를 향해 눕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는데, 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쩍 나왔지. 다들 시커먼 얼굴만 봤던 탓인지 타키오 씨의 얼굴색이 엄청 창백하게 보였어. 거기다 볼살도 엄청 빠진 거 있지!”
“철야를 한 탓 아닐까……? 공부도 적당히 하는 게 좋은데 말이야!”
이케베는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타키오는 이케베와 같은 나이에 문과를 나온 이케베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신경쇠약의 요양을 위해 봄부터 이케베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이케베 집 창고에 봉건시대의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걸 듣고 그는 환호했고, 이후로 그런 서류를 연구하느라 쉬는 날도 없이 지내고 있었다.
“도대체 무언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하면 터무니없는 탐닉가가 되어버려서 스스로도 자신을 어떻게 제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지는 정도의 편집광이거든……”
“그 열정의 100분의 1이라도 나한테 베풀어준다면 좋겠는데. 이케베 씨, 이건 비밀인데 말이죠, 전 올해도 또 낙제를 했어요.”
“바보 같기는.”
유키에가 웃었다.
“비밀을 이렇게 큰 목소리로 떠벌여도 좋아?”
“아하하하…… 윽, 이미 포기한지 오래야! 날씨야 개어라, 날씨야 개어라! 유키에 씨의 다리는 예쁘구나! 저 곡선이, 쭉 하고 이렇게, 허리로 이어지는데…… 이리로 저리로 뻗어서……”
“미타니(三谷) 바보!”
유키에는 양말도 신고 있지 않은 다리를 치마 속으로 감추려고 하면서 말했다.
“넌 그런 것만 생각하니까 낙제 따위를 하는 거야. 바다까지 와서 기껏 한다는 게. 네 눈길이 어떤지 알아? 엄청 천박하다고. 유리(百合) 씨랑 테루(照)짱도 미타니가 제일 싫다고 말했거든.”
미타니는 그렇게 까닭 없이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별달리 불쾌한 기색도 없이 의자 위에 무릎을 세우고 양팔로 끌어안았다.
“뭘 시끄럽게 쫑알대고 있냐?”
미타니는 일부러 장난을 치듯이 뻔뻔스럽게 말을 해봤다.
“난 말이야, 그저 정직할 뿐이지. 여자의 모습을 보고 그런 식의 공상을 하지 않는 남자 따위는 없다고. 타키오 씨라도 분명 그럴 거다.”
“어머, 무례한 인간. 그러니까 너를 야만인이라고 하는 거야. 여자 앞에서 멋대로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놈이니까.”
“아니, 그건 찬사의 말이란 말야. 유키에 씨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두 사람이 바보 같은 말다툼을 하고 있는 동안 마작을 하던 일행이 승부를 끝내자 그 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타니에게 찬성이다. 이쪽 이야기에 신경이 쓰여서 엉망으로 지고 말았구만. 그건 그렇다 치고 저번에 누군가가 제안한 가장무도회를 오늘밤에 여는 게 어떨까?”
“모두가 수영복만 입고서? 그거 참 대담한 발상이다. 근대적인 바버리즘(고전적 표현을 따르지 않는 불순하고 야비한 사조)도 이 정도면 극치에 달했다고 해야 할 정도야. 대찬성이다! 자, 유키에 씨, 멤버를 끌어 모으자고.”
수영복 무도회라니, 설마 실현될 리도 없는 발상이었으나 그들은 비가 오자 지루함에 몸을 주체 못하고 뭔가 기발한 놀이는 없냐며 왕성하게 잡담을 나누었던 것이다.
“가장무도회라면……”
또 누군가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이 집 창고에 여러 가지 의상이 많이 있잖아? 그걸 최대한 갖고 와서 카미시모(裃 에도 시대 무사의 예복)를 입고 싶은 놈은 카미시모, 갑옷 무사가 되고 싶은 힘센 놈은 갑옷을 뒤집어쓰고, 얏코(奴 에도 시대 무사의 종복)가 되고 싶은 놈은……”
“그건 네가 되는 게 어때?”
“……뭐, 그런 식으로 분장을 해서 술자리라도 개최하는 게 어떨까?”
그런 의상이 여기 창고 안에는 가발까지 갖추어서 종류별로 잘 보존되어 있다. 해당화 나무가 저택 사이에 숲을 이루고 있어, 꽃 피는 계절이 오면 나무 사이로 수많은 등롱을 달아 불을 밝히고, 꽃구경을 온 손님들이 마음대로 분장을 하여 하룻밤의 연회를 개최하는 행사가 옛날부터 5~6년 전에 죽은 이케베의 아버지 대까지 전해져 왔었다. 부인들은 함께 겐로쿠(元禄 기모노 양식 중 하나로 겐로쿠 시대 유행한 크고 화려한 무늬) 모양의 후리소데(振袖 소매가 긴 부녀자용 기모노)를 입고 춤을 추거나 술잔을 돌리며 떠들썩한 꽃놀이 연회를 여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현세의 괴로움을 잊어버리고 마치 먼 이야기의 시대에서 논다는 생각을 품게 해준다는 평판이 있어, 해당화 저택의 꽃놀이 연회라고 하면 마을 사람들에게는 손꼽아 기다리는 축제였다.
“하지만 엄청 더울 걸. 이런 한여름 밤에 한다면……”
“부인들이 땀을 흘리며 그런 모습을 하고 우리들 무사에게 공손하게 술을 따르는 광경을 생각하면, 동료여, 즐겁지 않겠나?”
얘기가 그에 이르자 누구나 헛기침을 하면서, 지금 자신들의 눈에 익은 여자들의 유행이라는 것은 그저 미국 스포츠의 영향을 받아서 요즘에는 남녀의 구별도 없는 꼴이라고 비난을 하더니, 고풍스런 후리소데에 몸을 감싸고 하느작하느작 부끄러움을 품은 부인들의 조심성 있는 모습 속에서 꿈을 품어야만 진짜 소중하고 감미로운 감정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운운하는 무척이나 편향된 의상론을 제기한다든지 하면서 떠들어댔다.
“그러고 보니 창고 2층에 매우 훌륭한 인형이 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어? 난 우연히 봤을 뿐인데 순간 나도 모르게 유령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 근데 그건 실제 살아있는 사람이랑 똑같이 생겼더군. 여자들 앞에 그 인형을 갖고 와서 밤 연회석에 갖다놓는 게 어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유키에는 문득 시선을 돌려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 죽은 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슬퍼한 나머지 교토에서 인형사(人形師)를 불러 만든 언니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언니의 기모노를 전부 인형을 위해 정돈하여 봄에는 봄옷을 입히는 식으로 계절마다 그에 맞게 갈아입혔고, 머리 모양을 고쳐준다거나 음악을 들려준다거나 하며 마치 살아있는 딸에게 해주는 것과 똑같이 애지중지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건 지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로 상자 속에 있을 텐데, 지금은 무슨 기모노를 입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들 터무니없는 생각에 기고만장하여 ‘나는 카미시모를 입은 나리가 되겠어’ 라든지, ‘그렇다면 나는 갑옷 입은 군인이 좋아’, ‘그럼 나는 앞머리를 얹은(과거 관례 전의 사내아이의 머리 모양) 팔팔한 시동이 되겠어. 분칠을 새하얗게 하면 달리 보겠지’ 라든지, ‘다들 무사에 관리밖에 없으면 연극이 성립되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적(敵) 역할을 해라’, ‘뱀우산(무늬가 그려진 종이 우산)을 든 사다쿠로(定九郎 가부키극의 등장인물)가 되어 춤을 추면 꽤 멋지겠어’ 등 온갖 소리를 하며 웅성거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