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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가나 북스의 전자책 『해이기 - 일본 환상소설 단편집 2』 일부를 연재합니다.
* 서지정보 및 판매처 안내 : http://pegana.tistory.com/108
* 공개 기간 : 무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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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부동
타치바나 소토오
生不動 / 橘外男
1
홋카이도(北海道)의 루모이(留萌) 항구는 정확히 말하자면 테시오쿠니 루모이군 루모이마치(天塩国留萌郡留萌町)에 있는데, 물론 이런 벽지의 작은 항구 따위가 여러분의 관심을 끌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삿포로(札幌)에서 소야혼센 왓카나이(宗谷本線稚内) 행을 타고서 3시간, 후카가와(深川)라는 역에서 갈아타서 다시 1시간 반. 루모이 본선(留萌本線) 종착역이라고 하면 제법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동해의 시커먼 파도에 떨고 있는 한적한 어촌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10여 년 전의 1월 중순이던 추운 날 저녁, 나는 여기에 와본 적이 있다. 무엇을 위해 이런 북쪽의 작은 항구 마을 따위에 일부러 가야만 했는가, 지금 생각해봐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그 시절엔 홋카이도를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데에 딱히 이거다 싶은 목적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나도 이제 홋카이도를 떠나 도쿄로 가자고 결심했던 무렵이었으니까 그 시절 마음이 맞았던 삿포로의 기생인 키미타로(君太郎)라는 스물한 살짜리 기생과 잠시 남의 눈을 피해서 둘만 있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도피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행선지야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되도록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한 시골만을 골라서 다녔던 것 같다.
그때도 섣달 그믐날을 눈앞에 둔 25, 26일부터 삿포로를 떠나서 우스(有珠), 노보리베츠(登別), 오토이넷푸(音威音府), 나요로(名寄) 등등 이른바 눈에 파묻혀 잠든 듯한 마을만 골라 당장이라도 내리기 시작할 듯 무겁게 드리운 회색 하늘 아래를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떠돌아 다녔다. 서로 딱히 열을 올려서 몰두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갈라지자는 결심도 세우지 못해, 그저 왠지 질질 끌면서 하루라도 더 오래 함께 지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돈이 없어질 때까지 거듭거듭 이런 여행을 이어갈 작정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런 얘기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어차피 키미타로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쓸데없이 파고 들어갈 내용도 없지만, 일단 우리가 루모이 항구에 도착한 건 저녁 5시 무렵이 아니었나 추측한다. 홋카이도의 벌판은 이미 어슴푸레해져 눈이 내릴 듯한 하늘은 어둑하고 낮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을은 정류장 앞의 광장에서 바람에 날려 양쪽으로 수북하게 쌓인 눈더미의 그늘에서 반짝거리는 등불을 훔쳐볼 수 있었으나, 당연히 이런 한적한 항구 마을에 우리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등불을 켜들고 맞이한 지배인에게 이끌려 역 앞에 있는 마루겐(丸源)이라는 이 근방에서는 꽤 큰 3층짜리 여관으로 향했다.
어쨌든 목욕을 해서 몸을 데운 후 솜옷을 입고 저녁 식사를 느긋하게 먹기 시작했다. 이런 시골역이라도 열차의 종착역인 걸까. 기관차의 교체 작업이라도 하는 건지 기관고 근처에서 증기를 토해내는 소리와 함께 둔한 기적 소리가 눈에 둘러싸인 적적한 밤의 두터운 공기를 뒤흔들며 너무나도 눈이 많은 시골 정거장다운 정취를 전해줬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와 키미타로는 아까 가정부가 불을 붙이고 간 스토브에 땔나무를 집어넣으면서 코타츠(炬燵 이불을 씌워 만든 화로) 옆에 앉아 뜨겁게 데운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이미 열흘 넘게 이렇게 장소를 바꿔가며 마셨고 기차 안에서는 하도 마셔 술에 익숙해진 목에는 이제 딱히 술맛이 좋다고 할 정도도 아니어서, 적당히 마시고 끝낸 후 각자 바닥에 파고들어 버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던 걸까.
2
문득 심상치 않은 웅성거림에 꿈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났다. 깊어만 가는 얼어붙은 눈길 위를 달려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 째지는 듯 울부짖는 소리. 밖에서는 녹록치 않은 분위기를 전해왔다.
영락없이 불이 난 거라고 나는 직감했다. 어릴 때부터 화재라고 들으면 일단 달려 나가 살펴보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질 않는 성격이었다. 이렇게 아는 사람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바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퍼져나가 마을 전체를 뒤덮는 큰불로라도 번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솜옷 위에 허리띠를 단단히 매었다. 그때 자고 있는 듯이 보이던 키미타로가 무거운 마루마게(丸髷 기혼 여성의 머리형) 아래서 눈동자를 또렷하게 떴다. 아까부터 밖이 떠들썩하니까 나처럼 눈이 떠진 듯했다.
“불이 났다 하면 이런 곳에까지 와서도 뛰어나가네. 위치도 모르면서 미아라도 되면 어쩌려고?”
키미타로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옷차림으로 감기라도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줬으면 해!”
이불깃에 볼을 묻으며 눈이 부신 듯이 게슴츠레 뜨면서 말했다.
그 사이에 여관 사람도 일어나 나간 모양이다. 덜커덕 하고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어마어마, 큰일이야! 큰일이야! 어쩜 좋아, 지배인님! 빨리 와보세요! 빨리요!”
울음 섞인 새된 여자의 외침이 들렸다.
나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마침 있던 나막신에 발을 끼웠지만 한 걸음 떼려던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움직이지 못했다.
길 위의 눈은 사람 허리 높이 정도로 쌓였지만 눈은 밟아 다질 수 있기에 그런 식으로 겨울 중에 만들어진 통로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집집의 처마 옆에는 지붕까지 닿을 정도로 쓸어서 쌓은 눈더미와 바람에 쓸려간 눈이 작은 산처럼 곳곳에 즐비해 있다. 그 벽이 높은 통로 위를 지금 넘어지고 구르면서, 작은 산의 그늘이 가려져 보였다 숨었다 하며, 전신이 생부동(生不動 부동명왕과 같이 영험 있는 사람, 혹은 산 채로 몸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홍련의 불꽃을 피어올린 남녀 세 사람이 쫓고 쫓기며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불을 끄려고 집에서 들고 온 이불을 던지거나 방석을 갖고 와서 세 사람을 쫓아서 달리거나 필사적으로 각자 무언가 고함을 지르고 있던 중이었다.
화염에 휩싸인 세 사람이 눈사태를 맞고 굴러 들어오는 가게에선 집에 불이 붙을 걸 두려워해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아직 나는 태어나서 이 정도의 엄청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밤눈에도 하얀 눈의 거리를 구르며 달려오는 시뻘건 불꽃이 주위 둘러쌌고, 검은 사람 그림자가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내가 머무는 곳까지는 대여섯 채 정도 떨어져 있었으니 이쪽까지 올 위험은 없었지만, 내 옆에서 떨고 있는 여자들은 살아있다는 느낌도 없이 몸부림치면서 소리쳤다.
“빨리, 어떻게든 해! 아, 빨리 꺼줘야 해! 아! 아아!”
그런 식으로 체면이고 뭐고 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뭉쳤다 멀어졌다 하면서 불덩어리는 서로 왕래를 거듭하며 뒹굴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마침내 몽롱한 느낌이 들면서 이 현장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친 듯 달린다고 생각한 건 내가 잘못 본 거였다.
그들은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인데 전신이 화염에 휩싸인 젊은 여성의 불을 끄려고 그 자신도 화염에 휩싸인 나이든 여자가 필사적으로 뒤쫓고 있다. 또 그 여자를 쫓아서 불을 피어올린 남자가 여자의 불을 때려서 끄려고 미친 듯이 안달하고 있다. 불덩어리 세 개가 뒤범벅이 되어 서로 쫓으면서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모두 격렬한 불꽃을 몸에서 뿜으며 불덩이 같은 모습을 하고 뭉쳤다 흩어졌다 하며 거리를 굴러가고 있다. 무참하다고도 처참하다고도 말할 수 없을 지옥도와 같은 장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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